② 1907년 위 사실을 수색코저 출장한
③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④ 1919년 4월 5일
⑤ 1919년 4월 15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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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스코팔드”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김덕용(金德用)·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한말(韓末)의 군인으로서 1907년(융희 1)의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직접 대결하다가 부상하여, 고향인 제암리로 내려와 김성열(金聖烈)·안종후(安鍾厚)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이 때 이 사실을 수사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 헌병 두명을 타살하고 피신생활을 하던 중 3·1운동을 맞았다.
그는 4월 5일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인과 함께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이어 일본군경은 고주리(高舟里)로 달려가 6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일본군은 그들의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그의 부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3·1운동(김진봉, 교양국사총서 31, 1977) 146∼148면
- 3·1운동비사 8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67∼1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