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687
성명
한자 金德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3.25 경기도(京畿道) 수원군(水原郡) 향남면(鄕南面) 발안리(發安里)에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그 후 발안(發安)장날을 기하여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1919.4.15 일군(日軍) 20여명이 제암리(堤岩里) 부락에 내습(來襲)하여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다음 밖에서 석유를 뿌리고 방화하여 소사(燒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그러나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부인과 함께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이어 고주리에서 6명이 죽었는데, 일제는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67∼168면
  • 3·1운동(김진봉, 교양국사총서 31, 1977) 146∼14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덕용 - 경기도 수원(水原) 3.1운동, 제암리 학살
본문
1900년 1월 6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향남면(鄕南面) 제암리(堤岩里, 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종교인들을 주로 살해·방화했기 때문에 비종교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당시 천도교 측 희생자 명단에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독교인으로 추정된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된 이후 수원과 인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진행되었다. 제암리에서도 기독교인 안종후·홍원식, 천도교인 안종린(安鍾麟)·안종환(安鍾煥) 등은 3월 25일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28일에는 인근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일본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군중이 순사 노구치(野口)를 처단하고 관공서와 일본인을 응징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격렬한 항쟁이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제암리 사람들은 인근 향남면 발안리(發安里, 현 화성시 향남읍 발안리) 장날에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때 안상용(安相鎔)·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강태성(姜泰成) 등과 함께 계획과 실행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4월 5일 발안리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을 설득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투석전을 벌여 면사무소·주재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 거류민을 공격하여 40여 명이 도피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는 등 대규모 항거로 전개되었다. 만세 시위가 전개되자 일본군 아리타(有田) 중위와 부대원 20여 명이 제암리로 출동하였다. 이들은 제암리·고주리를 발안장터 만세 시위의 주요 거점으로 파악하고, 본보기로서 초토화할 의도가 있었다. 제암리에서 15세 이상 남성을 제암리 교회당에 출석하라며 모이게 하고, 형식적인 질문을 한 이후 본격적인 학살과 방화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21명의 마을 남성은 물론 이들을 구하러 달려온 여성 2명이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때 당시 19세의 나이로 마을의 지도층과 함께 교회당에 출석하였다가 살해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고주리로 이동하여 역시 경주 김씨 및 천도교의 주요 인물인 김성렬(金聖烈) 등 6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의 집을 집중적으로 방화하는 악행을 자행하였다.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은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가 4월 17일 현장을 방문하고 찍은 사진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외부로 알려졌다. 또한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 등을 통해 일본군의 학살 관련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합동묘역 제암리 3.1운동 순국선열묘역 경기도 화성시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제암리 3 1운동 순국 기념관 경기도 화성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덕용(관리번호:7687)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