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평안남도 평원(平原) 사람이다.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에 재학 중, 동경(東京)에서 전개된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식의 11명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일제에 의해 조국이 병탄되자 재일 유학생들은 항상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 왔는데, 1916년 4월 17일 당시, 재일 유학생들은 모두 5백 24명이었는데 일본 경찰은 유학생들을 항일의식을 기준으로 하여 갑, 을로 구분하여 철저한 감시를 하여 왔다.
특히 1910년이래 일본에서는 조선기독교 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조선유학생 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조선여자 친목회(朝鮮女子親睦會) 등 재일유학생 친목단체들이 있어서, 회원들의 지·덕·체의 함양과 학문 연구의 목적 외에도 조국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다.
1918년 12월 하순,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동경 Y.M.C.A. 강당에서 열렸는데, 이 때 연사로 나온 서 춘(徐椿)·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윤창석(尹昌錫) 등은 한결같이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자주독립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웅변대회가 끝난 후,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그 결과 그와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최근우(崔謹愚)·김도연(金度演)·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과 대표위원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거사 준비를 하였는데,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은 이광수가 작성하되, 최팔용 이하 9명의 대표들이 자필로 서명하여 영어와 일어로 번역하여 일본의 조야(朝野)와 외국 공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또 이 운동을 동경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거족적으로 확산시키기로 하고, 그는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몰래 귀국하였다.
그는 보성중학(普成中學) 출신으로 전 보성중학 교장인 최 린(崔麟)과 사제지간이므로 그를 통하여 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과 만나 유학생들의 계획을 알리고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서 정노식(鄭魯湜)으로부터 거액의 독립운동 보조금과 선언문 인쇄에 필요한 활자를 얻었고, 여자 유학생인 김마리아와 현덕신(玄德信)에게서도 성금을 보조받아 준비를 하였다.
거사를 하루 앞둔 2월 7일 저녁,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최필용 등의 대표와 백관수의 집에서 만나, 자신들이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뒷일을 후배들에게 부탁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 학우회 총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4백여 명의 학생들이 Y.M.C.A. 강당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오전부터 수십 명의 정·사복 경찰을 그곳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식은 진행되어 회장인 백남규(白南奎)의 개회선언, 최팔용의 조선청년 독립단의 발족 동의,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에 이어 서 춘이 연설하려 하자,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학생 대표들을 모조리 검거하였다.
이 때 그도 체포되었으며, 이 해 6월 26일 제2심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7개월 15일간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6·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57·8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78·56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21·124·126·128·130·135·142·16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34·38·40·50·5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6·411·41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