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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961888
성명
한자 金點學
이명 金善基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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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8 훈격 애족장
1927년 4월 동경조선청년동맹(東京朝鮮靑年同盟)에 가입하여 활동 중 민족협동전선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귀국하여, 동년 7월 이후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 집행위원(執行委員),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大邱支會) 대표(代表), 경북청년동맹(慶北靑年同盟) 집행위원(執行委員)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합동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9년 7월경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으며, 1930년 9월 옥고장진홍(張鎭弘)옥중(獄中) 순국(殉國)에 항의하는 시위에 동참하였다가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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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점학은 1926년 대구 사립 교남(嶠南)학교 고등과 3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4월, 사립 일본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달 동경조선청년동맹(東京朝鮮靑年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7월 퇴학을 당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협동전선 운동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대구에서 사회운동단체 간의 갈등을 없애고, 통일적으로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1927년 6월 24일 대구청년회(大邱靑年會)·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대구아구청년동맹(大邱我求靑年同盟)·대구무산청년동맹(大邱無産靑年同盟) 등 4개 청년단체들이 대구노동공제회관에 모여 합동대회를 개최하였다. 4개 단체의 통합기관의 이름을 「대구청년동맹」이라 하고, 김점학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합동대회 해산 후, 임시로 대구청년동맹 제1회 집행위원회가 열렸고, 이때 조사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곧바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1927년 8월 7일 대구청년동맹의 주최로 대구청년동맹회관에서 노동공제회 등 11개 단체가 모여 80연대 육군대위 세카와(賴川正雄)의 만행사건에 대하여 그 대책을 토의하였다. 여기서 「전 대구시민에게 격문을 배포할 것, 피해자의 진찰은 한국인 의사회에 진찰받기로 함, 실행위원을 선정하여 앞의 2가지 사항과 실행조건을 작성하여 시민대회를 개최할 것」 등 3개의 결의 사항을 정한 후, 30명의 실행위원을 뽑았는데, 김점학은 실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28일, 대구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제1회 정기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간사에 선출되어 회제(會制)와 조직에 대한 사항을 의결하였으며, 신간회 전조선대회에 참가할 대의원으로도 뽑혔다. 1928년 1월 8일 김천청년동맹회관에서 「경북청년운동자간담회」를 열어, 「경북청년연맹」을 조직하기로 결정을 보았는데, 이때 김점학은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월 9일 대구청년동맹 긴급위원회에서 서무부장으로 선임되었고, 1928년 8월 27일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직을 사퇴하였다. 1929년 5월 27일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경북 신간회 4개 지부 대표 12인이 모여, 소구역대표회를 열고, 연합대표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정대표(正大表)에 선임되었다. 1929년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연행되었다.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구중등학생의 비밀결사에서 김점학은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이던 박광세(朴光世)와 일본 사회주의자 시바타(柴田健助)와 함께 산파역을 할 정도로 당시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비밀결사 관련자는 1928년 11월 초 경북 경찰부 고등과에서 검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김점학은 1929년 7월경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김점학은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동월 13일부터 대구형무소에서 형기가 시작되어 1931년 3월 13일 출옥 예정이었다. 그러나 1930년 9월 장진홍(張鎭弘)의 옥중 순국(殉國)에 항의하는 시위에 동참하였다가, 1930년 9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건조물(형무소) 파손으로 징역 8월을 받고, 1931년 3월 13일부터 형기가 시작되어 동년 11월 13일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후 1944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내 祖國 내 山河(朴進穆, 1994) 21, 24, 29, 31, 45, 52, 113면
  • 신간회연구(이균영, 1996) 164면
  • 朝鮮日報(1929. 9. 12)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311면
  • 민초(박진목, 1983)20, 21면
  •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1991) 243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刑事事件簿 · 受刑人名簿
  • 中外日報(1927. 6. 26·8. 9·12. 31, 1928. 1. 2·1. 9·1. 15·8. 27, 1929. 3. 17·4. 27·5. 27·8. 8·9. 18·9. 19, 1930 2. 26·9. 12)
  • ·東亞日報(1929. 8. 8·10. 22, 1930. 3. 12)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30. 3. 11)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30. 9. 18)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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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점학 김선기(金善基) 경상북도 달성(達城) 세카와(瀨川正雄) 만행사건, 대구고보 학생비밀결사 사건
본문
1906년 10월 6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현 대구광역시) 옥포면(玉浦面) 간경리(干京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선기(金善基)이다. 1920년대 후반 대구 지역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1926년 대구 사립 교남학교(嶠南學校) 고등과(高等科) 3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4월 사립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달 동경조선청년동맹(東京朝鮮靑年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 해 7월 퇴학당하여 귀국하였다.1927년 6월 24일 대구노동공제회관(大丘勞動共濟會館)에서 대구청년회·대구청년동맹·대구아구청년동맹(大邱我求靑年同盟)·대구무산청년동맹(大邱無産靑年同盟) 등 4개 청년 단체들이 모여 대구지역 사회운동단체 사이의 갈등을 없애고 통일적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개최한 합동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자리에서 4개 단체의 통합기관으로서 새롭게 대구청년동맹이 탄생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합동대회 해산 후 곧바로 대구청년동맹 제1회 집행위원회가 열렸는데, 이때 조사부장에 선임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날 그 자리에서 혼자만 일본 경찰에 붙잡혀갔으나 곧바로 풀려난 것으로 추측된다.1927년 8월 대구에서 일본인 장교가 한국 어린이를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구소년동맹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와 함께 이 사건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1927년 8월 5일 대구 80연대 소속 육군 대위(大尉) 세카와(瀨川正雄)가 자신의 조카와 말다툼을 하다가 신구실(辛玖實)이라는 10세 아동과 부녀자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일에서 시작되었다. 세카와는 평소 한국인은 때려도 상관없다는 관념을 뿌리 깊게 가지고 있던 인물로, 육군 중위(中尉) 시절인 1919년 5월 18일에도 충남 서산(瑞山)의 명윤원(明潤源)이라는 한국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하여 상해치사(傷害致死)하고 정당 방위라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만간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42연대의 군사교육 배속 장교로 부임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다.이 사건에 격분하여 같은 해 8월 7일 대구청년동맹 등 11개 단체가 노동공제회관에 모여 ‘세카와 만행사건’에 대한 대책을 토의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전 대구시민에게 사건을 알리는 격문을 배포할 것, 책임자인 80연대장과 가해자인 세카와는 조선 민족 및 대구 각 사회단체에 각각 사과장(謝過狀)과 사죄장(謝罪狀)을 공개 제출할 것, 80연대장에게 세카와의 엄정한 처치를 요구할 것, 조선의사회(朝鮮醫師會)에 교섭하여 피해 소년을 다시 진찰하게 할 것, 이상의 요구사항에 응하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전국적 여론을 불러일으킬 것” 등이 결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 사항을 구체화하기 위한 실행위원을 선출할 때, 여기에 뽑혀 활동하였다. 대책회의 후 곧바로 개최된 실행위원회에서 격문이유서(檄文理由書) 작성위원으로 선정되었다.도쿄(東京) 유학 시절부터 민족협동전선운동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1927년 9월 창립된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에도 일찍부터 관여하였다. 같은 해 12월 28일 대구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개최된 신간회 대구지회 제1회 정기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회제(會制)와 조직에 대한 사항을 의결하였으며, 신간회 전조선대회(全朝鮮大會)에 참가할 대의원(代議員)으로도 선정되었다. 1929년 5월 23일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4개 지부 대표 12인이 모여 소구역대표회(小區域代表會)를 열고 연합대표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정대표(正大表)로 선출되었다. 신간회 대구지회 복대의원(複代議員)으로도 활동하였다.1928년 1월 8일 김천청년동맹(金泉靑年同盟)에서 경북기자대회를 계기로 모인 경북청년운동자간담회(慶北靑年運動者懇談會)에서 경북청년연맹이 결성되었는데, 이날 개최된 창립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음날인 1월 9일 대구청년동맹 긴급위원회에서 서무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2월 18일 개최된 집행위원회에서 금릉학원(金陵學院) 폐쇄에 대한 반대성명서를 발표하고 도 당국에 그 철회를 요구하는 교섭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민중도서관(民衆圖書館) 부흥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27일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을 사직하였다. 전국적인 청년운동의 중앙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의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29년 6월경 대구고등보통학교(大丘高等普通學校) 학생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광세(朴光世), 일본인 사회주의자 시바타(柴田健助)와 함께 1927년 11월 이래 여러 차례 재편 결성된 대구고보의 신우동맹(新友同盟)·혁우동맹(革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 등 학생비밀결사에 강사로 활동하여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학생 결사가 결성되었던 1927년 11월 남산정(南山町) 백대윤(白大潤) 학생 집에서 개최된 사회과학강좌(社會科學講座)에 강사로 출석하여 윤장혁(尹章赫)·장종환(張鍾煥) 등 청강생들에게 “신간회는 조선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대동단결을 위한 것이고, 합동의 이유는 현재 조선의 사정이 정치적 압박과 외래 자본의 습격에 따라 급속도로 민족경제가 파멸을 맞이하였으므로 전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이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한 데서 알 수 있다.이 일로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자, 즉시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3월 13일 출옥 예정이었으나, 1930년 9월 장진홍(張鎭弘)의 옥중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에 동참하였다가 9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건조물 파손으로 또 다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로 인해 1931년 11월 13 풀려났다.출옥한 후 광복을 맞기까지 대구와 중국 베이징(北京) 등에서 항일운동을 계속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밀정 이종영(李鐘滎)의 밀고로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1944년 5월 당시 이상훈(李相薰)·박진목(朴進穆) 등 15인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있었다고 한다. 12월 12일 5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다가 얼마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이후 다시 수감되었다가 1945년 8월 17일 출옥했다고 한다.1945년 8월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위원회에서 경북 달성군 업무를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봄 미군정의 좌익 인사 검거 때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붙잡혀서 1949년에 대구로 호송된 후 행방불명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후 1962년 12월 1일 후손에 의해 1960년 3월 5일 자로 사망신고가 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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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1년 대구복심법원 1930-03-11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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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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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원 신암 선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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