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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86
성명
한자 閔肯鎬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8년 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07년 8월 2일 군대해산(軍隊解散)(令)이 내리자 당시(當時)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특무정교(特務正敎)로 있다가「국가(國家)간성(干城)이 이대로 해산(解散)할수 없다」하고 대대장(大隊長) 대리(代理) 김덕제(金德濟)에게 설득(說得)시켜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전원(全員)무장(武裝)시켜 원주주재(原州駐在) 일본경찰분견소(日本警察分遣所)습격(襲擊)하였으며
2. 5일에는 원주(原州)로 들어오는 일본군 토벌대(日本軍討伐隊)격파(擊破)하고 의병(義兵)으로 전환(轉換)하여 훈련(訓練)받은 정예병(精銳兵)으로 강원(江原), 충북(忠北), 경기지방(京畿地方)에서 왜병(倭兵)수차(數次)에 걸쳐 격파(擊破)하여 용감(勇敢)전투(戰鬪)하였으나 원주(原州) 강림(講林)전투(戰鬪)에서 전사(戰死)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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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민긍호는 경성(京城)에서 태어난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서 광무 원년에 진위대에 들어가 강원도 원주(原州) 진위대 고성(高城) 분견대의 정교(正校)였다. 후에 춘천(春川) 분견대에 전입, 광무 4년경 정교의 직에 있었으나, 다음 해 처음으로 특무 정교의 자리에 앉게 되자 발탁되어 원주 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5일, 마침 원주 진위대장 홍유형(洪裕馨)이 상경하여 부재중일 때, 충주 수비대 이궁(二宮) 소위 등 19명이 원주 수비대를 해산하기 위하여 온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에 그는,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거두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하고, 부하에게 비상나팔을 불게 하여 약 삼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선 원주 우편 취급소를 습격하고, 계속해서 일경을 습격하였다. 이때 순경들이 남산을 넘어 충주로(忠州路)로 퇴각하므로 추격하다가 이궁(二宮) 소위들을 만나 세 시간을 격전하였다.

그 후 민긍호는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편성하였다. 이들 소의병부대는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지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활약하였다. 이같은 민긍호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강원도, 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부대로는 허준(許俊), 이경삼(李京三), 김만군(金萬軍), 고석이(高石伊), 김군필(金君必), 이한창(李韓昌), 한기석(韓基錫), 한갑복(韓甲復), 윤기영(尹起榮), 이강년(李康秊), 변학기(邊鶴基), 조인환(曺仁煥) 등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8월 5일의 민긍호의 봉기 사실을 보고 받은 일본 사령부는 경성 주재 보병 제47연대 소속의 2개 중대와 기관총 4정, 공병 1개소대로 편성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여 의병 진압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은 중앙에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올렸다.

"지형을 잘 아는 토민의 비호를 받고 있는 폭도의 첩보 근무는 대단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정탐하여 은현출몰(隱現出沒)하므로,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의 소탕에 노력하였으나, 수일간 조금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때 지방민들이 의병들과 협력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8월 12일 약 2백 명으로 편성된 민긍호의 부대는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 분견소를 포위 공격한 후 이곳 일본 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이 의병부대로 지원해 왔으므로 음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여주, 이천, 양근 일대에서 의병들은 크나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군 사령부는 당황하여 대전, 수원 주둔의 일군(日軍)을 이천, 장호원, 여주 방면으로 증강하고, 서울 주둔 일군을 양근, 이천 방면으로 증파하였다.

8월 중순 민긍호는 이강년과 같이 충주 공략의 작전계획을 세운 후 22일 행동을 개시하였다. 민긍호 의병 부대는 우측으로 공격하고, 이강년 부대는 좌측으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강릉 방면으로부터 약 2백 명의 의병부대가 응원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이강년 부대에 앞서서 23일 오전 11시 30분 경부터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이천 북방과 산지동(山地洞)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9월 7일 약 600명의 민긍호 의병 부대는 2개 부대로 나뉘어 홍천(洪川)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9월 10일 약 이백 명의 의병이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 나머지 사백 명의 의병은 낭천 군아(狼川郡衙)를 기습 공격한 후 그곳 무기고에서 총기, 탄약을 접수하였다. 또 20일에는 춘천 남방으로 10리되는 정족(鼎足) 부근에서 약 삼백 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이고, 23일에는 횡성군 봉복사(鳳腹寺)에서 약 350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서, 11월 27일에는 홍천 서남 양덕원(陽德院)에서, 12월 8일에는 원주 동북 작곡(鵲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8년 2월 28일 원주 치악산 아래인 강림(講林) 동쪽 약 10리되는 등자치 부근에서 적에게 노출되었다. 적군은 강림에서 출발, 사자산(獅子山), 구룡산(九龍山) 방면으로 우회하여 등자치로 접근하였다. 이때 민긍호의 부대는 그 10리 지점인 궐덕리(蕨德里)에 잠복하고 있었다. 29일 오전 11시에 접전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민긍호의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민긍호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의병 중의 한 사람이, "우리 대장 민씨는 어디 계신지 소리를 치시오."하였다. 이에 포박된 민긍호가 도주하자, 일군은 그를 사살하였다. 이때 의병 열한 명이 전사하고, 의병진은 북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 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의병 부대였다. 그는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로 전전하면서 전부 백여 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군에게 가장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일군의 기록인 "의병 토벌 결과의 개요" 가운데서도 민긍호 의병 부대에 대하여, "각처에 있어서 약간의 폭도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으나, 폭도의 출몰이 교묘하여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하다."라고 하여, 일군들이 그들의 작전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긍호 의병 부대의 눈부신 활약과 그 전과를 그대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127.1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97, 687, 733, 734면
  • 기려수필 12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67, 568, 569, 570, 582, 58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민긍호 - 서울 정미의병
본문
1865년 서울에서 아버지 민치봉(閔致鳳)과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명종 때 좌찬성을 지내고 『동몽선습』을 저술한 민제인(閔齊仁)의 12대손으로 명성황후와는 같은 후손이었지만 20촌 간으로 먼 일가였다. 1897년 지방대에 입대하여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의 하사로 있다가 춘천분견대로 전입하였다. 1900년에 춘천분견대에서 정교(正校)로 진급하였으며, 1년 후인 1901년 특무정교(特務正校)로 발탁되어 원주진위대 본대에서 근무하였다. 1907년 8월 5일 강원도 원주에서 원주진위대 병사들을 이끌고 봉기를 하였다. 이 봉기는 의병운동이 의병전쟁으로 확대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민긍호의 의병봉기는 일제에 의한 군대해산에서 시작되었다. 군대해산은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지방의 진위대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원주진위대는 8월 10일, 원주진위대 소속 강릉분견대, 여주분견대는 8월 13일에 해산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가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그날 오후 원주진위대에 전해지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시위대의 봉기 소식에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동요하였고, 이를 진정시키고자 대대장 참령 홍유형(洪裕馨)이 훈육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병사들의 반항심만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홍유형은 군부(軍部)의 소집령을 이유로 8월 2일 부관 2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출발하였고, 8월 3일 지평에서 100여 명의 인민이 그를 붙잡아 원주진위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홍유형은 여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봉기를 결심하고 대대장 대리 정위(正尉) 김덕제(金德濟)와 함께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봉기를 결심하고 원주의 장날인 8월 5일 오후 2시 봉기하였다. 비상나팔을 불어 장교와 병사들을 집결시켜 “시위대의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화가 우리에게도 미칠 것이니 어찌 앉아서 죽을 것이냐?”라고 하면서 의병봉기를 선언하였다. 대부분의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의병에 참여하였지만 정위 권태희(權泰熙), 부위(副尉) 권태영(權泰榮) · 장세진(張世鎭) · 백남숙(白南肅) · 이현규(李玄珪) · 참위 이현용(李顯用) 등은 반대하다 체포되었다. 또 원주 장날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의병에 동참한 자들이 있었다. 민긍호는 원주진위대 병사와 호응자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한 후 무기고를 열어 소총 1,200정과 탄환 4만 여발을 꺼내어 그들을 무장시켰다. 이후 부대를 재편성하여 크게 4개 부대로 편성하고 각 부대 지휘관에 민긍호, 김덕제, 손재규, 한갑복이 취임하였다. 이들은 원주읍 우편취급소를 시작으로 원주군아(原州郡衙), 경찰분견소 등 일본의 침략정책을 최일선에서 시행하고 있던 주요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또 원주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에 대한 공격도 감행하여 그들의 가옥을 파괴하고 상가의 물건 등을 압수하여 군수물자로 충당하였다. 의병의 공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재정고문분서원(財政顧問分署員) 1인, 경무고문분견소보조원(警務顧問分遣所補助員) 5인 · 여(女)1인, 우편취급소원(郵便取扱所員) 3인 · 여(女) 2인, 상인 2인 등으로 일본인 관리와 상인으로 일본의 침략정책을 지역에서 시행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민긍호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충주로 퇴각하는 이들 일본인들을 추격하여 원주 남산으로 이동하였는데, 8월 6일 그 곳에서 충주수비대 니노미야(二宮)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정찰대와 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2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을 거쳐 남산을 점령하였고, 일본군 정찰대는 경무관과 거류민을 데리고 충주로 패퇴하였다. 이후 의병부대는 각기 나눠져 원주 인근 지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민긍호는 8월 7일 일부 병력을 횡성으로 보내 횡성군수에게 군수지원을 요청하고 8월 8일 횡성으로 들어왔다. 횡성에 주둔하여 횡성지역 의병장 오정묵(吳正默), 한상렬(韓相烈) 등과 연합의병을 구성하고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8월 10일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주천을 거쳐 제천으로 입성하였는데 그 수가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확대되어 민긍호 의병부대에 참여한 의병의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민긍호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는 약 300여명 이었고 나머지는 횡성군수 심흥택(沈興澤)에게 “강원도내 32개 의진은 모두 내가 지휘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의병의 형태로 민긍호 의병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원주진위대의 봉기 소식을 접한 한국주차군사령부는 8월 6일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시모바야시(下林)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고 보병 2개 중대, 기관총 4문, 공병 1소대로 구성된 지대를 편성하여 원주로 급파하였다. 8월 10일 오후 원주에 도착한 시모바야시 지대는 원주지역을 집중적으로 정찰한 다음 주변지역으로 정찰활동의 반경을 넓혔다. 이에 따라 스에야스(末安) 중위가 이끄는 1소대는 제천방면으로 정찰을 나갔다. 이 정찰과정에서 제천에 주둔하고 있던 민긍호 의병부대를 비롯한 연합의병부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제천에 주둔하고 있던 2,000여 명의 연합의병은 스에야스 소대가 제천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에 대비하여 민긍호 의병부대는 천남 남쪽에, 윤기영 의병부대는 천남 뒷산에 매복하였고, 오경묵 의병부대와 정대무 의병부대는 서울고개 좌우편에 복병하였다. 또 이강년 의병부대는 영월 방면 조을치에 주둔하였다. 8월 15일 매복해 있던 의병 초병들은 접근하는 일본군 척후병을 발견하고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이 때 영월 방면 높은 산에 매복해 있던 민긍호 · 한상열 의병부대는 스에야스 소대가 청풍 방면 마을에 숙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아사봉 뒤에서 역습하여 스에야스 소대의 후미를 공격하였다. 4시간이 넘게 전개된 이 천남전투에서 의병은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 입히는 전과를 올렸으며, 스에야스 소대는 충주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일본군 정찰대를 격퇴한 민긍호, 이강년 등 연합의병부대는 충주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민긍호 의병부대와 조동교 의병부대 등은 박달재와 다릿재를 넘어 충주의 서문과 북문을 공격하고, 이강년 의병부대는 청풍을 경유하여 충주성의 동문을 공격하기로 하고 공격 시간을 8월 23일 한낮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조동교의 부대가 박달재에서 일본군 제52연대 제2중대에 차단당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민긍호 의병부대는 충주 초입에 있는 다릿재(충주 산척면 송강리)를 넘어 충주 강령촌(康嶺村)까지 진출하였지만 일본군에 막혀 이강년 의병부대와 합세할 수 없었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23일 오전 단독으로 충주를 공격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의병부대는 북문 밖 5리 지점까지 진출하였다가 양막현(良幕峴, 충주 안림동 약막)으로 후퇴하면서 충주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충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의병부대는 주요 전략 중 하나였던 일본군의 통신시설을 파괴하여 충주 주둔 아다치(足達) 지대와 서울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일시적으로 통신이 두절되어 혼란을 겪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홍천, 낭천(현 화천군 강원도), 춘천, 횡성, 원주 등지에서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는데, 1907년 9월 7일과 9월 10일에 홍천을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낭천군아(狼川郡衙)를 기습 공격하여 그 곳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총기 및 탄약을 접수하였다. 또한 9월 20일에는 춘천 남방으로 10리 되는 정족(鼎足) 부근에서 약 300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23일에는 횡성군 봉복사(鳳腹寺)에서 약 35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의병전쟁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 정부는 각도에 선유사를 파견하여 선유활동을 시작하였다. 강원도선유사에는 홍우석(洪祐晳)이 임명되었다. 그는 9월 24일 서울을 출발하여 9월 28일 춘천을 거쳐 10월 8일 홍천에 도착하였다. 홍천에서 선유활동을 마치고 횡성으로 가는 길에 홍우석은 민긍호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이에 즉시 답서를 보내 무기를 버리고 귀순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민긍호는 귀순을 거부하는 답서를 보냈고, 서신을 통한 귀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홍우석은 직접 만나서 귀순시키거나 아님 체포하고자 원주에서 회동하자는 답서를 보냈다. 이후 10월 15일 원주에 도착한 선유사 일행은 원주지역에 대한 선유활동을 전개하던 중 10월 18일 민긍호로부터는 답서를 받았다. 답서를 받은 홍유석은 선유위원, 일본군 시가(志賀) 소위, 경무보(警務補), 일진회원 등을 이끌고 원주읍 북방에 있는 태장점(台庄店) 송월정(松月亭)에서 태극기를 세워 표시해 놓고 기다렸다. 민긍호도 약 5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로 바라볼 수 있는 2리 지점의 산위로 와서 해사자(解事者) 3~4명을 선유사측으로 보냈다. 홍우석은 작은 여울 북쪽에서 성상(聖上)의 조서를 받들어 효유하였으나, 민긍호는 홍우석의 요구를 거절하고 5개조의 요구사항을 시행하라고 요구하였다. 양쪽을 오가며 진행된 협상은 날이 어두워져 다음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원주군아(原州郡衙)로 돌아왔다. 그러나 민긍호가 의심을 품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을 걱정하였던 홍우석은 그날 밤 다시 선유위원, 군주사, 부노(父老)만을 이끌고 태장점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서신을 써서 초치하고 효유하였으나 새벽까지 민긍호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 다시 태장점에 갔을 때 역시 민긍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민긍호는 홍우석이 진실로 효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병부대를 진압하고 의병장을 체포하기 위해 유인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민긍호를 회유하려던 홍우석의 선무공작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민긍호 의병부대는 강원도 의병 중 최대세력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계속해서 접촉하고자 하였다. 그 일은 강원도관찰사 황철에게 맡겨졌다. 황철은 민긍호에게 일체의 군기와 탄약을 반납하고 귀순할 것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보냈다. 이에 민긍호는 10월 26일 답서를 보내 황철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귀순요구를 거절하였다. 그 반박 내용을 보면, 첫째 광무황제가 양위한 것은 위에서부터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협박에 의한 것이고, 둘째 일본인들이 인구(人口), 가사(家舍), 우마(牛馬), 산림천택(山林川澤)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금을 징수하여 빼앗아 가고, 셋째 만일 외국의 막강한 병력을 대항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장자방(張子房)도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했을 것이며, 넷째 촌락이 불타는 것은 의병의 책임이 아니라 왜로(倭虜)가 무도하게 행패를 부린 탓이며, 다섯째, 만일 의병이 해산하면 우리나라 인민이 일본에게 곤욕을 당하지 않고 태평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라고 반문하였다. 황철은 첫 번째 귀순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횡성군수 심흥택을 민긍호 의병부대가 주둔한 홍천군 좌운(左雲)으로 직접 파견하였다. 11월 8일 심흥택은 황철의 공한을 가지고 민긍호를 만났다. 민긍호는 귀순요구를 거절하고 황철의 주장을 반박하는 서신을 진위영(鎭衛營) 창의사령부(倡義司令部) 대장(大將)의 명의로 작성하여 11월 9일 심흥택에게 전해주었다. 이 회신서신의 주요 내용은 첫째, 일본이 비록 강하다 하더라도 ‘땅을 넓히려고 힘쓰는 자는 망한다.’라는 이치에 따라 반드시 망할 것이고, 둘째, 일본인 통감이 우리나라의 국정을 주관하고 산림 · 천택 · 토지 · 인민을 우리 황제가 손 댈 수 없으니 일본에 의해 받는 피해가 매우 크고, 셋째, 귀순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할 수 있으나 이는 민긍호가 원하는 것이 아니며, 넷째, 무력을 중지하고 힘을 기르면 반드시 대성할 날이 있다고 하니 강원도관찰사가 그리하여 대성하면 자진해서 의병을 해산하고 목을 베어 보답하겠다는 것이었다. 강원도선유사에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서신 및 횡성군수의 파견을 통해 적극적으로 선유활동을 전개하였지만 민긍호의 확고한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한편, 9월 초 원주지역에서 이인영(李麟榮)이 이끄는 관동창의대가 출범하였는데, 민긍호는 여기에 진위대사령부(鎭衛隊司令部)로 참여하였다. 민긍호의 참여는 병렬적 관계로 대등한 입장에서 연합의병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고, 활동 또한 독자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이인영, 민긍호, 이강년, 허위 등은 전국의 의병을 하나로 연합하고자 접촉하고 연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것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군이었다. 민긍호는 13도창의군에서 관동창의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3도창의군은 서울에 있는 친일파를 제거하고 통감부를 해체하고 종래의 굴욕적인 조약을 파기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각 의병부대는 11월 25일경 동대문 밖에 집결하여 일시에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면서 서울로 진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군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서울로 진격하고자 각 부대는 몇몇 부대로 나눠 이동하거나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도 원주군 소초면 일대에 주둔하다가 평창으로 이동한 것을 시작으로 횡성군 갑천면(甲川面), 홍천군 서석면, 인제군, 양구군을 거쳐 12월 7일에 회양군 문등리(文登里)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2월 14일에는 고방산리(古方山里)를 출발하여 화천군 천미(天尾)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어 횡성군 동북 약 60리 지점으로 이동하였으나 원주수비대 야마모토(山本) 소대와 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107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1월에는 양구수비대장 후지에(藤江) 소위가 이끄는 정찰대와 임당리(林塘里)에서 충돌하는 등 민긍호 의병부대는 양주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1월 중순 이후 허위 의병부대, 이인영 의병부대 등 각 의병부대가 도성 주변에 속속 도착하였다. 그런데 총대장인 이인영이 갑작스럽게 부친의 부음을 접하면서 13도창의대장의 모든 권한을 군사장인 허위에게 넘기고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에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은 중단되었고, 아직 집결지에 도착하지 못하였던 민긍호 의병부대 등은 활동하던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그 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원주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고, 일본군은 민긍호 의병부대에 대한 정찰 및 수색활동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민긍호 의병부대의 근거지가 노출되었다. 일본군은 2월 28일 강림(講林,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서 동방으로 10리쯤 떨어져 있는 등자치(登子峙, 횡성군 강림면 월현2리) 부근에 민긍호 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충주수비대 순사대 권 경시(警視)를 지휘관으로 하는 15명의 토벌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29일 오전 6시경 강림을 출발하여 사자산(獅子山,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 구룡산(九龍山, 영월군 수주면 운학리) 방면으로 우회하여 등자치로 전진하였다. 이때 등자치 북방 약 10리 지점인 궐덕리(蕨德里, 횡성군 강림면 월현2리 고비덕마을)에 민긍호가 부하 90명과 함께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추가적으로 확인하고 그 마을을 포위 공격하였다. 기습 공격을 받은 민긍호 의병부대는 토벌대에 대응하고자 일부 병력을 궐덕리 서방 고지로 이동시켰지만, 대부분은 촌락 위벽(圍壁)에 의거하여 저항하였다. 하지만 계속된 충주수비대 순사대의 공격으로 의병 20명이 사살되고 민긍호가 체포되는 피해를 입고 궐덕리 동북방으로 후퇴하였다. 충주수비대 순사대는 체포한 민긍호를 서울로 이송하기 위해 강림으로 이동하였다. 후퇴하였던 60여 명의 민긍호 의병부대원들은 구출대를 조직하여 그날 밤 강림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 강림전투에서 구출대 일부 병력이 밤 11시경 촌락 안으로 진입하여 구출작전에 들어가자 충주수비대 순사대는 민긍호를 이송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고 바로 사살하였다. 민긍호의 사망을 확인한 의병은 구출작전을 중단하고 강림 북방으로 후퇴하였다. 이 구출작전에서 의병은 11명이 전사하였고 한국 순사 4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민긍호의 순국이후 강원도 영서지역 일대에서는 의병전쟁이 크게 위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민긍호의 의병봉기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봉기였으며, 의병운동이 의병전쟁으로 확대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원주진위대 봉기는 진위대 전체가 의병이 되었기에 진위대 보관 신식무기가 의병부대에게 제공되어 초기 의병부대의 무장과 전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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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강원도 원주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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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동상 민긍호의병장 기념상 강원도 원주시
2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 서울특별시 중랑구
3 고 민족영웅 의병대장 민긍호 충혼탑 강원도 원주시
4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5 장소 원주진위대터 강원도 원주시
6 비석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 강원도 횡성군
7 사당 대한이산 묘 전라북도 진안군
8 장소 강릉항일기념공원 강원도 강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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