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19년
3. 1921년 7월 9일
4. 1922년
5.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특파원 강태동(姜泰東)·이정래(李丁來)로부터 동포 관공리의 사직을 권고하는 전단과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명의의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포고문, 상인들의 폐점을 권유하는 포고문 등을 교부받았다. 그리하여 최익무(崔 武)·서상하(徐相夏)·이종선(李鍾善)과 함께 〈대한민보(大韓民報)〉·독립축하가(獨立祝賀歌)와 포고문을 등사판으로 수백매씩 복사한 후 대구 시내 각 사립학교와 상점에 배포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그는 1920년 6월 하순 양한위(梁漢緯)·권태일(權泰鎰) 등과 대구시 남문시장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한 결과 조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일제에 협력하는 한국인 관공리를 처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같이 하였다. 이를 위해 이들은 폭탄을 제조하여 대구 남방 비파산(琵琶山)에 숨겨두고 기회를 기다리던 중 일경에 붙잡혀 계획이 좌절되었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및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그는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일경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1945년 8월 2일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269·27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4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