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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82
성명
한자 文鳳儀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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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10월 조선독립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온 철원(鐵原) 애국단원 신현구(申鉉九)의 권유를 받아 애국단 충청도지단(愛國團忠淸道支團)에 가입하고 재무 감독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피체되고 징역 4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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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남 서산(瑞山, 현 태안) 사람이다. 그는 1919년 9월 안 황(安滉)으로부터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취지와 목적을 듣고 이에 가입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支團)을 설치하였는데, 그는 동단의 재무감독(財務監督) 겸 충청도 방면의 조직을 맡았다. 당시 대한독립애국단에서는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통하여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9년 10월 동단의 단장(團長) 신현구의 지시에 따라 충청도 지역의 조직 확대와 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동년 11월까지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논산군(論山郡)·예산군(禮山郡) 등지에 지부 조직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년 12월초에는 직접 충청도 지역에 내려가 청양군의 정상길(鄭相吉) 등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자금수합 활동도 폈다. 또한 1월 하순경 동단의 단장 신현구가 일경에 붙잡히는 바람에 본부 조직의 개편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동년 12월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과 힘을 합쳐 혈복단(血復團)을 새로이 조직하고 동단의 충청남도 대표를 맡았다. 그런데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단(江原道團 : 일명 鐵原愛國團)이 발각되고 이어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자 일경에 붙잡혀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0. 12. 23 경성지방법원)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90∼103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봉의 - 충남 태안(泰安) 1919년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차 독립시위
본문
1878년 7월 3일 충청남도 태안군(泰安郡) 안면(安眠)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울 태평통(太平通)에 있는 개성여관(開城旅舘)에서 안황(安滉)을 만나 대한독립애국단에 대해 알게 되었고, 여기에 참여하였다.대한독립애국단은 1919년 4월경 신현구(申鉉九)를 단장(團長)으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에서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직 구성은 중앙에 재무(財務)·서무(庶務)·통신(通信)·외교(外交)·학무(學務) 등의 부서를 두고, 지방에는 행정 단위별로 도단(道團)과 군단(郡團) 등의 지단(支團)을 두고 있었다.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조달하고,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각종 명령을 이행하며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역적으로는 서울·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때 중앙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의 재무감독을 맡으며, 한편으로 충청도 조직의 편성과 확대를 책임졌다.1919년 10월 신현구를 만난 후 임시정부가 추진 중이던 제2차 독립시위운동 계획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제2차 독립시위운동’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처음으로 전개한 대규모 국내독립운동으로, 국내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과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등이 연계하여 만세시위를 추진한 것이었다. ‘제2차 독립시위운동’은 임시정부와 대동단 사이의 이견, 일제 경찰의 탄압 등으로 다소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애국단 중앙 간부로서 이에 가담했던 1919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충청도 조직 확장에 나서기 시작했다.1919년 11월, 태평통에 있는 남성여관(南城旅舘)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충청도 출신 조직원을 직접 모집해 갔다. 먼저 이시우(李時雨)를 애국단원으로 규합한 후 충남 청양군(靑陽郡)·논산군(論山郡)·예산군(禮山郡) 등지에 파견하여 조직 확장에 나서게 했으며, 유순환(兪順煥)·정상길(鄭相吉) 등을 단원으로 참여시켰다. 이러한 활동으로 11월 중순 청양군단이 설치될 수 있었다. 이때 청양군단장에는 유환방(兪煥邦)이, 충청남도단장에는 유경재(兪暻在)가 임명되었다.애국단의 충남지역 조직 확대와 함께 군자금 모집도 원활하게 성과를 거두었다. 먼저 유경재 등으로부터 2백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2월 초순에는 직접 청양군 비봉면(飛鳳面)에 사는 정상길(鄭相吉)을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 1백원을 모금하였다. 이같이 충청도 지방의 조직과 인맥을 활용하여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활발하게 나섰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본부 조직과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다.1919년 11월 하순경 대한독립애국단장 신현구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본부 조직이 불가피하게 개편되었다. 이때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던 김태원(金泰源)과 함께 애국단을 계승하는 조직으로 혈복단(血復團)을 결성하고, 충청남도단의 대표를 맡았다. 혈복단에는 임시정부 특파원인 신봉균(申鳳均)과 김교상(金敎爽)·김교선(金敎善) 등이 가세함으로써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더욱 체계화하였다.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의 일명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인 강원도단이 발각되면서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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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정치범죄 처벌령위반, 증회,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공갈취재 징역 4년, 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20-12-2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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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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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애국선열 추모비(철원) 강원도 철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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