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1∼2월 서울에서 천도교 (天道敎) 교조 (敎祖) 손병희 (孫秉熙) 의 명을 받아 독립운동자금 5.000원 (圓) 을 이승훈 (李昇薰) 에게 전달하여 기독교계의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하고 동년 2월 27일 보성사 (普成社) 에서 독립선언서 (獨立宣言書) 의 인쇄를 돕고 이를 비밀리에 천도교당 (天道敎堂) 으로 운반한 후 다시 전국 각지에 배부케 하였으며 3월 1일 태화관 (泰和館) 에서 독립선언식 (獨立宣言式) 거행 당시 진행상황의 기록을 담당하는 한편 탑동공원 (塔洞公園) 에 운집한 학생 시민들과의 연락을 맡아 활동 (活動) 하고 서울시내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였으며 민족대표 (民族代表) 들의 피체 (被逮) 후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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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월 중순경 손병희(孫秉熙)의 부탁으로 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의 독립운동 3대 원칙을 기록하여 동지들에게 전달하였고 동년 2월 중에 천도교 교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5,000원(圓)을 인출, 이승훈(李昇薰)에게 전달하여 기독교계의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하였다.
동년 2월 27일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돕고 이를 비밀리에 천도교당으로 운반한 후 다시 전국 각지에 배부케 하였으며,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당시 진행상황을 기록하는 한편 탑동 공원(塔洞公園)에 운집한 학생 및 시민들과의 연락을 맡아 활동하였다.
3월 1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하였고, 시위 후에 붙잡힌 민족대표들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3·1운동비사(이병헌) 5∼6면 이규갑의 서문 66면
- 3·1동인회발기인취지문급간부약력(1961. 3, 필사본) 25∼27면
- 옥파이종일선생논설집, 3권(1984. 8. 25) 옥파비망록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11∼1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