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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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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李在明
이명 李秀吉, 李壽吉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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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열투쟁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1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8세에 선교사(宣敎師)를 따라 미국(美國)까지 유학(留學)하였으며 귀국(歸國)(後)에는 동지(同志)들과 교결(交結)하여 국사(國事)(謀)하던 중
2. 1909년 12월 22일 명동천주교당(明洞天主敎堂)에서 백이의 황제(伯耳義皇帝) 레오폴드2세(二世)추도식(追悼式)거행(擧行)되는데 이완용(李完用)참석(參席)한다하매 교당문 외(敎堂門外)에서 군밤장사를 가장 대기(假裝待期)하고 있다가 인력거(人力車)를 타고 나오는 이완용(李完用)비수(匕首)로 찔렀으나 실패(失敗)하고 체포(逮捕)되어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에서 처형(處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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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그는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美國勞動移民會社)의 이민모집에 응하여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숙청을 결의하자 그는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한 그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등박문이 동행한다는 사실에 접하고 평양역(平壤驛)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정거장 부근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등박문이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이등박문을 처단코자 동지 김병록(金丙綠)과 함께 서울과 원산(元山)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 괴수들보다 같은 민족으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慶興學校)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의 처단은 그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이 담당하고, 김정익(金貞益)과 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7일에는 최종적으로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는데,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세 사람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여, 조창호와 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 및 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을, 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후 12월 12일 상경하여 거사 준비중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경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그의 정의로운 행동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은 인력거 아래로 떨어졌고, 그는 재빨리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난자하였다. 그의 거사로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이 달려들자 이들과 격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일경들의 칼에 하체가 상하게 되어 붙잡혔다. 그런데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매국노 이완용은 불행히도 잔명을 보존하여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의 의연함은 왜적의 재판장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그것은 1910년 봄 공판장에서 내외의 많은 방청인들이 운집한 가운데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죄목을 통렬히 꾸짖고 나라를 위하여 그를 처단하였음을 역설하고, 일본인 재판장의 공모 여부에 대한 심문에 이천만 조선 동포가 모두 매국노를 죽이는데 가담한 것이라고 답한 것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변호사인 안병찬(安秉瓚)의 성의있는 변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다. 그는 1910년 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5면
  • 기려수필 156~158·280면
  • 매천야록 518·532·537·5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28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9·70·45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8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10·212~2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4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45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75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60·39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52·25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4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33·475~481·486·488~499·501~504·506~509·514~517·521~526·528~530·551~57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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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재명 이수길(李壽吉) 평남 평양(平壤) -
본문
1887년 10월 16일 평남 평양 성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안(鎭安)이고, 이명은 이수길(李壽吉)이다. 1895년 평양 아청리(衙聽里)로 이사하여 남산현 언덕의 일신학교(日新學校)를 다녔다. 당시 남산현에는 미국 감리교전도사들이 1903년 세운 남산현교회가 전도사업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기독교를 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勞動移民會社)의 이민모집에 응하여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던 중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중심인물이 된 임치정(林蚩正) · 이교담(李交倓)등과 친교를 맺었다. 1906년 3월 미국 본토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안창호(安昌浩)등이 창립한 항일단체로 미국 내 지회 설립을 추진하고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간행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1907년부터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통일연합기관으로의 성격을 강화시켜 갔다. 1907년 6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서 정미조약을 강제 체결하였으며,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에 공립협회 지도부는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매국적(賣國賊)의 숙청을 결의하였다. 이때 매국적 처단 계획에 자원하였다. 1907년 10월 9일 공립협회 회원 정정근과 함께 시베리아 배편으로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중국과 러시아(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매국적 처단 활동에 동참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매국적 처단활동을 준비하던 중 1909년 1월 융희황제(순종)의 서도(西道)(평안도)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함께 평안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역에서 이들을 처단하려고 동지들과 함께 정거장 부근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는 안창호가 이토는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순종 곁에 있을 것이니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 실행하지 말라고 저지함으로 불발되었다. 그 후 이토 처단을 도모하고자 동지 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서울과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海參崴)로 이동하면서 거사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처단했다는 거사 소식을 듣고서야 귀국하였다. 귀국 후 계획을 변경하여 이완용 李完用 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결하기로 결단하였다. 이 방략은 공립협회의 회원으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인 매국적 처단 특명을 받고 파견된 것인 동시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투쟁방법이기도 하였다. 의거 직전 김구를 만나 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하여 몇 사람을 죽이고자 준비 중이라는 계획을 털어놓으며 단도 한 자루, 단총 한 정과 이완용 등의 사진 몇 장을 품속에서 내놓았다고 술회하였다. 본격적인 동지의 규합을 위해 자신의 고향 평양으로 가서 생사를 같이 할 자객단의 본거지를 평양에 설치하고 수차에 걸쳐 비밀모의를 이어갔다.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동산현에 위치한 평양 경흥학교(慶興學校)내의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에서 김정익(金貞益) · 박태은(朴泰殷) 등 9명이 투표로 일진회(一進會)의 회장 이용구(李容九) 처단을 의결하였고, 김정익과 실행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친일주구 척살을 위한 준비를 추진하던 중인 12월 4일 일진회의 ‘합방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에 12월 6일 박태은의 집에서 긴급 비밀회의를 열고 이동수(李東秀) · 박태은 · 김정익 · 이응삼(李應三) · 전태선(全泰善) 등과 논의하던 중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 처단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펼쳐 격론 끝에 이완용과 이용구를 동시에 처단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12월 7일 이동수 · 김병록과 함께 이완용 처단을 담당하고, 동지 김정익과 조창호(趙昌鎬)는 이용구 처단으로 각각 업무 분담을 확정지었다. 오복원(吳復元) · 박태은 · 이응삼 3인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조창호와 전태선은 거사에 사용할 권총 및 단도 등 무기구입을 담당하였다. 거사 실행을 위해 12월 12일 평양을 떠나 상경하여 서울 남부에 모의 거처를 정하였다. 자신과 미국에서 같이 생활한 적이 있는 동래부의 김병록을 급히 서울로 불러 올려 거사에 가담시켰다. 김정익 · 이동수 · 전태선 등 동지들도 서울로 올라왔다. 17일경 이들은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갖고, 먼저 이완용을 살해하고 이용구를 나중에 살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과 동시에 무기 분배를 마치고 김용문(金龍文)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상경 후 기회를 엿보던 중 김용문으로부터 이완용 등 매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鍾峴)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이동수 · 김병록와 함께 동 교회 앞으로 가서 이완용의 귀로를 기다렸다. 오전 11시 30분경 이완용이 인력거에 타고 통과하려고 할 때에 노상 북측의 전신주 그늘에서 뛰어나와 비수를 휘둘러서 이완용의 왼쪽 어깨를 찔러 치명상을 입히고 하차하여 도망가려는 이완용의 허리 등 두 곳을 찔렀다. 다시 공격하려 할 때 인력거꾼(車夫) 박원문(朴元文)이 이를 저지하려고 하자 찔러 죽이고, 이완용을 척살하려는 순간에 이완용 호위순사에 의해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붙잡혔다. 동지 이동수 · 김병록은 다행히 도피하였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공판정에서 일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혼자 모든 책임을 떠맡으려는 의연한 태도로 자신은 국가에 바친 몸이므로 변론할 것이 없으나, 연루된 동지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결국 1910년 5월 18일 안병찬(安秉瓚)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이재명에게는 사형, 김정익 · 이동수 · 김병록 · 조창호 15년, 오복원 · 전태선 10년, 박태은 · 김용문 7년, 이학필 · 김이걸 · 김병현 · 이응삼 5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 법정에서 조금도 굴함이 없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다. 7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기각,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으로 2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99년 의거 현장이었던 명동성당 앞에 “이재명의사의거터”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2001년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에서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진안이씨 문중 재실 앞에 “이재명의사 동상”을 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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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모살미수, 고살 공소 기각[교(絞)] 경성공소원 1910-07-1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모살미수, 고살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0-09-15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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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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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이재명의거지 서울특별시 중구
2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3 동상 이재명의사 동상 전라북도 진안군
4 사당 대한이산 묘 전라북도 진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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