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6월 16일에
- 거의(擧義) : 의병을 일으킴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原州郡 富興寺面)에서 출생하였으며, 본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7월 24일 일제는 비밀각서를 교환하고 이어 27일에는 신문지법(新聞紙法), 29일에는 보안법(保安法) 등, 군대해산에 따라 예상되는 국민의 반발에 대처하는 악법을 공포한 뒤 8월 1일 먼저 시위연대 5개 대대를 해산시키고 이어서 지방의 진위대 8개 대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되기에 앞서 그 내막을 눈치 챈 군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군대 해산은 의병 진영의 군사적 조직화에 박차를 가했고 의병의 국민적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부터 그해 12월까지의 격전 횟수가 323회였다고 하는 것을 봐도 군대 해산 직후 격렬했던 항전상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의병항전이 격렬해지면서 각 의병진영에서는 서울 진격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 겨울에 각 진영의 연합 의병이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연합 의병체로서 13도 창의대가 형성되는데 모태적 역할을 한 인물이 이은찬이었다. 이은찬은 일찍이 1907년 9월(양) 이구재(李九載·求采)와 더불어 기병하여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그의 고향 원주는 진위대 해산 후 있었던 원주진위대 의병운동의 본고장이었다. 이은찬 등의 활동은 그러한 지역적인 영향하에서 고려되어져야 한다. 이들은 일부 해산병을 중심으로 의병 500명을 소모(召募)한 후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갔다.
이인영은 을미사변 후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문경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인영을 찾아가 나흘 동안 간곡히 기병할 것을 권유하고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이인영은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 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르게 되었다.
곧 비분에 찬 격문(檄文)을 사방에 띄워 많은 호응을 받고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다.
이때의 진용과 편성명단은 다음과 같다.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우 선 봉 장 김병화(金炳和)
총독장(總督將) 이구채(李球采) 후 군 장 채상준(蔡相俊)
중 군 장 이은찬(李殷瓚) 운량관(運糧官) 현이보(玄履甫)
좌 군 장 방인관(方仁寬) 재 무 관 신창선(申昌先)
우 군 장 권중희(權重熙)민춘원(閔春元)
유 격 장 김해진(金海鎭) 좌 총 독 장 김현복(金顯福)
좌 선 봉 장 정봉준(鄭鳳俊) 우 총 독 장 이귀성(李貴成)
이즈음 연천(漣川)에서 봉기한 허위(許蔿)의 의병이 당도하여 관동창의군 편제를 발전시켜 13도 창의군으로 개편하여 전국 의병 진영에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내어 서울 진격을 제의하였다.
"용병의 요결은 고독을 피하고 일치 단결하는데 있은 즉, 각 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를 이루어 경기로 들어가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되어 한국 문제 해결에 있어서 유리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진용이 편성되었다.
13도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황해진동의병대장 권중희(權重熙)
군 사 장 허위(許 蔿) 관서의병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동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 관북의병대장 정봉준(鄭鳳俊)
교남의병대장 박정빈(朴正斌)
호서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 (처음에는 신돌석이었다)
호남의병대장 문태수(文泰洙)
그러나 정미의병이 대중적 의병운동으로 크게 도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돌석(申乭石)·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의 부대 등 서민의병의 진영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특히 신돌석의 경우 연합 의진에 참여하였던 것을 그의 신분이 천민에 가깝다 하여 박정빈(朴正斌)으로 바꾼 것이 의병활동의 한계성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이강년과 민긍호의 부대가 서울 진격전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연합 의진의 대장인 이인영이 부친 사망을 이유로 하여 가장 중요한 시기에 물러나고 허위가 대장이 되어 진격을 감행하였지만 이미 기밀이 누설되어 동대문 밖 격전에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허위는 1908년 2월까지 서울 근교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은찬은 자신의 의진을 거느리고 포천·양근(楊根)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허위와 손을 잡고 유기적 전략을 전개하는 등 크게 위세를 떨치었으며 때로는 농민출신 의병장 김수민 의진과도 협력하였다.
그러나 1908년 말경 경기 의진의 주요 의병장이 처형되자 이 지역의 항일운동은 보다 격화되었다.
1909년 임진강 유역은 의병활동의 중심지로 되어서 적게는 수십 명, 많은 것은 200명 내외의 의병집단이 운집하였다. 이들은 양주·포천·연천(漣川)·삭녕(朔寧)·금천(金川)·백천(白川)·연안(延安)을 연하는 선내 및 해상 도서 유격전으로 일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타격을 주었다.
이은찬은 그들의 총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그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등 지방민에게 환심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군량(軍糧)·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할 때에는 직접 세궁민(細窮民)들로부터 거두지 않고 각 면장·동장에게 통고하여 거두도록 하고, 구입품에 대한 대금 지불은 기일을 어기지 않고 이행하였다.
또 필요한 때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물자를 받고 후에 반드시 화폐로 바꾸어 주었다. 따라서 지방민들은 의병을 믿었을 뿐 아니라, 의병을 위하여 보초도 서 주고 관헌의 동정을 살펴서 알려주는 등 그들의 활동을 지지, 옹호하게 되었다.
1909년 1월 온정원(溫井院) 부근의 의병에 대한 일군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1월 17일 해주수비대의 장졸 18명이 토벌대로 파견되자, 미리 연안(延安)·청단(靑丹)역 사이로 빠져 남방 연안 도서로 이동한 이은찬 의진은 1월 19일 야음을 타 2척의 배에 분승하여 연평도(延坪島)의 일군 파견대를 기습 공격하여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후 증산도(甑山島)로 후퇴하였다. 이때 이근수(李根守) 등 46명이 순국하였다.
2월 27일 이은찬은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容大) 등 약 3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양주군 석우리(石隅里) 북방 고지에서 양주와 축산리(杻山里)의 일군 헌병 연합 부대와 대격전을 벌여 큰 타격을 주었으나 또한 의병 부대에도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그후 이은찬은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간도지방으로 항일 운동의 거점을 옮겨 군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서울의 박노천(朴魯天)·신좌균(申左均) 등이 이러한 이은찬의 계획을 탐지하고, 조수연(趙壽淵)을 보내어 유인해 내도록 하였다.
"간도로 들어가서 군사를 훈련시키려면 군자금과 군량 등 그 비용이 적지 않게 필요할 것이요. 그 비용은 얼마가 들든 내가 부담할 터이니 서울로 잠입해 들어와 의논합시다."
사실 의병활동에는 비용이 적지 아니 들었으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은찬은,
"대장(이인영)이 여주에서 패전하고 지금 황간(黃澗)에 은신하고 계시니 가서 뵙고 의논하는 것이 도리이다."
하였으나, 조수연은 한 번 놓치면 안되겠으므로
"박노천과 신좌균을 용산역에서 만나 보는 것이 매우 좋을 듯하다."
고 강권하므로 3월 31일 용산역으로 갔다.
그것은 적의 함정이었으므로 곧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분노한 강기동(姜基東)·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永)·임명달(任明達) 등이 격문을 띄워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이은찬은 심문하던 검사가 거병한 이유를 묻자 대략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라를 빼앗겼으므로 보복하고자 거병하였으니 모반한 것이 아니다.그리고 너희는 우리가 예전에 청나라를 섬겼으니 오늘날 일본을 섬기기로 안될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데, 그러나 청나라는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적이 없지만 너희는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지 않았느냐?"
재판정에서도 그는 늠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너희와 싸우기를 대소 40여 차례 하였으며, 너희 병정 470여 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죽여라.······
나의 거의는 홀로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榮辱)을 생각하랴."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창생을 건지고자 해변에 띄웠는데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고 먼저 물에 빠지게 되었으니누가 동양의 만년을 기약하리오.
一枝李樹作爲船 欲濟蒼生泊海邊寸功未就身先溺 誰算東洋樂萬年
이은찬은 그 후 1909년 5월 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해 6월 16일에 순국하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미소를 잊지 않아 간수조차 감격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이은찬의 장례날에는 정 동(鄭童)이 와서 원수 갚을 것을 맹세하더니 결국 원수를 만나지 못하여 집에 남은 신좌균의 어린아이들만 죽였다. 민족의 비극이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의 의기를 칭송하였으나 그 역시 적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의 사후 이인영도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학보(일지사) 16집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04·505·563·56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727·793·79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98·99·111·254·255·371·372면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174면
-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137·138·161·163·334면
- 기려수필 126·127·128·129면
- 고등경찰요사 11면
- 매천야록 492·49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