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봄 구국 애국단체 (救國愛國團體) 인 신민회 (新民會) 에서는 만주 (滿洲) 에 독립기지 (獨立基地) 를 건설 (建設) 하고 독립군 (獨立軍) 을 양성 (養成) 하여 독립쟁취 역군 (獨立爭取役軍) 을 배출 (輩出) 하기로 결의 (決議) 함에 따라 1910년12월 친부 (親父) 이회영 (李會榮) 을 따라 만주 (滿洲) 로 망명 (亡命) 하여 1911년 만주 (滿洲) 로 이주 (移住) 하는 교포 (僑胞) 들의 정착 지원 (定着支援) 을 목적 (目的) 으로 경학사 (耕學社) 를 창설 (創設) 하자 서무 (庶務) 를 맡아 활동 (活動) 하고 1911년 신흥강습소 (新興講習所) 가 창립 (創立) 되자 교사 (敎師) 로서 독립군 양성 (獨立軍養成) 을 위하여 1920. 8월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가 폐교 (廢校) 될 때까지 10년간 (年間) 에 걸쳐 활동 (活動)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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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1910년 12월 신민회(新民會)의 구국 방략에 따라 독립운동기지의 확보와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한 부친 이회영(李會榮)을 수행하여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정착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과 함께 제일 먼저 신민회의 결의를 실천에 옮기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봄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하여 서무를 맡아 이주한 교민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였고 동년 4월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가 설립되자 초대교장인 이동녕 밑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며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10년간에 걸쳐 활동하였다.
1924년 귀국한 그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군자금의 조달에 힘쓰며 중국 동삼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집안 어른들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0輯 1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363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11·12·17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