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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877
성명
한자 金洪俊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4. 7월 일제(日帝)징용(徵用), 징병제도(徵兵制度)반대(反對)하여 29(名)동지(同志)들과 함께 대왕산(大王山)입산집결(入山集結)하여 죽창(竹槍)투석(投石)으로 무장(武裝)하고 집단항거(集團抗拒)하다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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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경북 경산(慶山) 사람이다. 1944년 7월 15일 안창률(安昌律)외 28명의 동지들과 함께 그는 일제의 징용·징병제도를 결사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대왕산(大旺山)에 입산·결집하여 죽창과 투석전으로 일경에게 항거하다가 동년 8월 10일경 식량조달차 하산하였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리하여 10월 4일 소위 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6월 23일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형사사건부
  • 재소자인명부(대구형무소)
  • 제85회 제국의회설명자료(전) 88·89면
  • 대구매일신문(1985. 8. 16)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홍준 금본홍준(金本洪俊) 경상북도 경산(慶山) 결심대의 대왕산 죽창 의거
본문
1922년 10월 24일 경상북도 경산군(慶山郡) 남산면(南山面) 사월리(沙月里)에서 아버지 김윤석(金尹碩)과 어머니 김순남(金順南)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금본홍준(金本洪俊)으로 고쳤다. 활동 당시 사월동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경산군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이 일제의 강제 동원을 거부하고 집단적·조직적으로 벌인 징용·징병 거부 운동, 이른바 ‘결심대(決心隊)의 대왕산 죽창 의거(大王山竹槍義擧)’에 참여하여 3소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일제 말기 전시 체제하에서 전쟁 동원을 위한 강제 징용과 징병은 1944년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경산 지역의 경우에도 1944년 6월 강제 징용 인원으로 350명이 할당되었는데, 1주일 만에 그 할당량을 채웠다. 그리고 남산면 남산국민학교에서는 징병 1기와 2기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산면 사월리 출신 박재달(朴在達) 등은 남산면 청년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항거하는 계획을 세우고, 1944년 7월 5일과 8일, 그리고 7월 15일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졌다.7월 15일 밤 9시경 경산군 자인면(慈仁面)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에 참가하였다. 3차 회합에는 의거 가담자 29명이 전원 참석하였고, 이 자리에서 최종 인원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저항할 장소와 무기, 그리고 식량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최종 인원으로 선정된 29명은 남산면 대왕산(大王山)을 저항의 근거지로 정하고, 입산 날짜를 7월 25일로 확정하는 등 저항 준비에 착수하였다.1944년 7월 25일 밤 남산면 사월·산양(山陽)·송내(松內)·남곡(南谷)에서 모인 26명의 청년들과 함께 출발하여 26일 새벽녘 대왕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박재달 등 정보연락대 3명을 제외하고 대왕산에 오른 26명의 청년들과 함께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하고 편제를 갖추었다. 이때 3소대 소대장 최외문(崔外文) 휘하에 편제되었다.결심대는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일제 경찰의 공격을 물리쳤고, 일제 경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의지를 굳게 다져 나갔다. 그리고 결심대는 주재소 파괴와 주재소 주임 살해, 식량 공급과 진지 이동 등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량 공급대가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어 붙잡혔고 식량 조달이 어렵게 되었다.1944년 8월 9일 식량 공급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대원들과 함께 하산하여 은신하였으나, 그 해 8월 13일 모든 대원들이 검거되는 과정에서 함께 붙잡혔다.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이른바 보안법과 폭력행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되었다.1944년 10월 14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 후인 1945년 8월 17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경상북도 경산시
2 공원 신암 선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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