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895
성명
한자 金碩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1.9월 일본(日本) 경도(京都)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국의 독립 밖에는 없으며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병폐하여진 일본 내의 사정을 이용하여 민중봉기를 도모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1945.9.20 경도지방재판소(京都地方裁判所)에서 예심종결결정(豫審終結決定)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1939년 3월에 도일(渡日)하여 1941년 6월 경도(京都)의 도촌토공(島村土工)으로 근무중 궁진(宮津)중학을 졸업하고 토공으로 취직한 전경원(全京元)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김말도(金末度)·이상문(李相文)등 수명의 동지를 확보하고, 동년 9월부터 여사군(與謝郡)소재 미륵신사 경내에서 누차 회합하고 민족정신고취 및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민족차별의 철폐, 징병제도의 반대, 항공병을 지원해서 일본군 기지 폭격, 일본 경찰에 들어가 대대적인 독립운동전개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44년 6월 일경의 토공숙사 일제 수색으로 전경원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활동이 탐지되어 동지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는 심한 고문을 받으며 장기간의 예심 끝에 1945년 9월에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경도지방재판소예심판결의 타인과의 접촉금지결정서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267∼270면
  • 예심종결결정(1945. 9. 20 경도지방재판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423·142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석용 금산춘남(金山春男) 경상남도 통영(統營) ‘재교토조선인토공민족주의그룹사건’ 항일투쟁(독립운동 논의)
본문
1924년 2월 16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원량면(遠梁面) 서산리(西山里)에서 태어났다. 금산춘남(金山春男)이라는 창씨명이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 3월 취업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교토부(京都府) 쓰즈키군(綴喜郡) 다나베쵸(田辺町) 시마무라(島村) 토목 건설 현장에서 노동업에 종사하였다.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 대우와 열악한 노동환경, 한국 노래조차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민족이 처한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1941년 9월, 직장 동료 전경원(全京元, 玉城信正)으로부터 한국인이 차별받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광복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호응하였다. 같은 시기 김말도(金末度)·이상문(李相文, 山本相文)·윤성택(尹成澤, 伊藤政雄) 등 토공노동자들도 동지가 되어 정기적으로 회합하였다. 일제는 이를 ‘재교토조선인토공민족주의 그룹(在京都朝鮮人土工民族主義グループ)’이라 불렀다. 비밀 모임 결성 이래 1944년 6월까지 3년여 동안 활동을 전개하였다. 모임을 통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추이, 식민지 한국에서의 한국인의 비참한 실상 등의 정보를 교류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였다. 한편으로는 일제 패망이 가까워졌음을 확신하고, 미국과 중국의 대(對)일본 전쟁을 원조해서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활동 방침을 논의하였다. 1942년 여름, 모임을 갖고 한국 내 순사 모집에 한국인이 제외되고 있는 실상을 논의한 뒤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의 허상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경찰 시험에 응모해 장차 자신들이 경찰관이 된다면, 직무를 수행하며 다수의 한국 청년을 규합해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3년 1월 모임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추이로 보아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므로, 한국 독립의 실현을 위해 적당한 시기에 무력으로써 ‘내란(內亂)’을 일으킬 것과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동년 5월에는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돌아와 한국의 사정과 ‘내지(內地)’의 식량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고, 동지들이 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앙양(昂揚)하는 데 일조하였다. 1944년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징병제 실시로 자신들의 입대가 가까워지자, 입대 후의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하였다. 입대하면 각자 배속된 병영 내 한국인 후배들을 계몽시켜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최전선에 포진하게 되면, 적당한 기회를 노려 ‘적(敵)’에게 투항 또는 통모(通謀)하여 일본을 패망으로 이끄는 ‘이적행위’를 하기로 하였다. 가능한 한 항공병과에 지원해 전투기로 일본 본토 폭격을 감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4년 6월 일제 경찰의 노동현장 일제단속 중 활동 내용 일부를 담은 전경원의 일기장이 발각됨으로써 관련자들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체포가 시행되었다. 6월 14일 체포되었고, 11월 10일 교토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국되었다. 이후 극심한 고문을 동반한 장기간의 예심을 거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45년 9월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공원 신암 선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석용(관리번호:3895)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