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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234
성명
한자 梁甸伯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13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삼십삼인 중(三十三人中)일인(一人)으로 2년 징역형(二年懲役刑)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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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위 한 사람으로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26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 예수교 장로회 전도사가 되었고, 1907년(융희 1)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에서 성직자 생활을 하였다.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와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를 설립하고, 1911년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14년에 예수교 장로회 총회 부회장이 되었다가 1916년 총회장이 되었다. 1919년 2월 12일에는 동지규합을 위해 선천에 왔던 이승훈(李昇薰)을 자기의 집에서 만나 이명룡(李明龍)·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 등과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는 이명룡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키로 약속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기 위해 자신의 인장을 함태영(咸台永)에게 보관케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동지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전도사업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76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3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74·96·103·147·148면
  • 고등경찰요사 74·96·103·147·14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2권 6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7·69·71·76·442·4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71면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8·2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2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4·17·20·21·28·39·41·42·44·45·46·50·5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양전백 섭(燮), 호 : 격헌(格軒) 평북 의주 105인사건, 3.1운동
본문
1869년 3월 10일(음력) 평북 의주군 고관면(古館面) 상고동(上古洞)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본명은 섭(燮), 자는 전백(甸伯)인데 자로 더 많이 알려졌다. 호는 격헌(格軒)이며 조선 전기 문신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21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증조부에게 한문을 배웠다. 9세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관면 관동리로 이주했다가 14세 때 가세가 더욱 기울어지면서 구성군 천마면 조림동 산골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런 중에도 한학 공부를 계속하여 15세 때 시부(詩賦)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18세 때 의주군 송장면의 유학자 전서(顚西) 이정노(李挺魯)의 경의재(經義齋)에 들어가 1년간 수학하였다. 19세 때 고향 조림동으로 돌아와 박영신(朴永信)과 결혼하여 슬하에 5남 5녀를 두었으나 네 자녀는 일찍 죽고 그가 별세 할 때 2남(윤모, 윤식) 4녀(윤성, 윤정, 윤숙, 윤도)만 남았다. 결혼 후 조림동에 서당을 세우고 훈장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892년, 인근 구성군 사기면 신시(新市)에 살던 친구 김관근(金灌根)로부터 기독교 전도를 받았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서울 구경 가자”는 김관근 말에 1892년 가을 상경하여 정동 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도사경회(都査經會)에 참석한 후부터 고향 서당에서 유교 경전과 함께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김관근이 설립한 신시교회 학당 교사로 청빙을 받아 신시로 주거를 옮겼고 1894년 청일전쟁을 겪은 직후 평양의 마펫(S.A. Moffett)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권서(勸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896년 평안북도 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된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휘트모어(N.C. Whittemore)의 조사가 되어 선천으로 옮긴 후 선천읍교회(후의 선천북교회)를 설립했고 인근 강계와 철산, 정주, 삭주, 곽산,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펼쳤다. 1902년 2월 평북지역에서는 최초로 장로가 되었고 마펫이 운영하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07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 해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한국 장로교회 최초 7인 목사 중 1인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2년간 평북 일대와 중국 지안현(輯安縣), 퉁화현(通化縣), 화이런현(懷仁縣) 지방 순행목사로 활동하다가 1909년부터 선천읍교회를 담임하였다. 선천에 교세가 급증하여 1911년 선천남교회를 분립시켰고 그 때부터 선천읍교회는 선천북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선천북교회 목회 외에 1905년 신성중학교와 1907년 보성여학교를 설립하여 신앙교육과 민족주의 계몽교육을 병행해서 전개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선천 뿐 아니라 평북(서북) 일대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즉 1911년 11월, 강규찬과 선우혁, 장시욱, 길진형, 양준명 등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 십 수 명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면서 시작된 105인사건의 주요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호된 고문과 악형을 받고 이승훈, 양기탁 등과 함께 형법 ‘모살미수’(謀殺未遂) 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 받았지만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 2심 및 같은해 10월 9일 고등법원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선천에 돌아와 교인들 앞에서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在監) 중 통초(痛楚)를 이기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다.”며 목사직에서 물러날 것을 천명했으나 교인들은 오히려 적극 지지를 표하였고 1914년 평북노회장을 거쳐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19년 2월 6, 7일경 중국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선우혁이 선천에 왔을 때 그를 자기 교회 사택에 묶게 하였으며 마침 선천에서 열리고 있던 평북노회 도사경회에 참석 중이던 이승훈과 유여대, 이명룡, 김병조 등 평북노회 소속 목사와 장로들과 함께 파리 강화회담에 대비한 해외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도 독립선언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이승훈과 이명룡, 함태영 등을 통해 서울과 평양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선천북교회 조사 백시웅과 선천남교회 김석창 목사, 그리고 신성중학교 교사 홍성익, 김지웅 등과 회합하면서 선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2월 26일경 “서울로 올라오라.”는 이승훈의 편지를 받고 선천을 출발, 2월 28일 저녁 9시에 경성역에 도착하여 봉래동 신행여관에서 1박한 후 3월 1일 오전 9시 남대문교회 함태영을 만나 독립선언식 장소가 태화관으로 바뀐 사실을 알고 오후 1시 종로에서 이승훈을 만나 함께 독립선언식장에 참석했다.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선언식 현장에서 체포된 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19년 7월 2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총독정치에 대한 불평을 품고 있는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교육정도가 저하하고 조선인의 대우가 일본인과 같지 않고 동일한 지위에 있다 하여도 아래 두는 것이 불평이며 기타도 다소 불평이 있으나 말하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1920년 9월 21일 열린 경성복심법원에서는 판사 앞에서 “십년간의 무단정치에 조선 사람에게 대하여는 여러 가지 대고통이 있었소. 조선 민족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는 미국 대통령의 말에 의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오. 일본나라가 ‘체코’ 민족에게 대한 태도를 보아서도 조선은 당연히 독립케 할 줄로 알았다.”고 진술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검사의 구형대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4일 공덕리 경성형무소에서 출감했다. 3개월 후인 1922년 2월 6일 선천북교회에서 ‘양전백 목사 포교 27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실상은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나온 것에 대한 지역 사회와 기독교인들의 위로와 치하를 담은 것이었다. 1925년 2월에는 그의 교역 30주년을 맞아 선천시내 기독교 및 사회 유지들이 “양전백 목사와 그의 가족을 영구히 부양할” 목적으로 ‘양전백목사부양회(梁甸伯牧師扶養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후 선천북교회를 계속 담임하였는데 매 주일 그의 설교를 듣는 남녀 교인수가 1천 6백 명이 넘었다. 또한 선천 기독교청년회 YMCA 설립과 활동을 지원하였고 1898년 선천읍교회 부속학교로 설립했다가 ‘강제 합병’ 직후 폐쇄되었던 명신학교를 1926년 복원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지속했다. 1927년 6월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사기(史記) 편찬 작업에 참석했다가 급성 질환에 걸려 치료를 받고 회생하였으나 1929년에 그 병이 재발하여 결국 3년 투병생활 끝에 1933년 1월 17일 선천읍 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33년 1월 21일 남궁혁 박사 집례 하에 기독교연합회장으로 엄수되었고 유해는 선천 교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40여 년 목회하는 동안 세례를 준 자가 3천 명이 넘었고 평생 전도한 거리를 합하면 12만여 리에 해당하였다. 한국 개신교 최초 성서어휘사전이라 할 수 있는 『신약성서전림(新約聖書典林, 東洋書院, 1912)』의 번역, 교열에 참여하였고 글로 남긴 설교로는 초교파 기독교 언론지 『기독신보』에 실린 「자유(自由, 1925.4.15)」와 「신사(信者) 는 그리스도를 입을 것(1926.1.20)」, 「엘리야(以利亞)의 사상(思想)과 여호와(耶和華)의 명령(命令, 1926.10.27)」, 「신년(新年)의 요구(要求, 1927.1.26)」, 「도세(度世)의 대방(大方, 1927.8.17)」 등이 있다. 1927년 6월 『동아일보』가 선정한 “조선의 자랑, 사계(斯界)의 중진(重鎭)”에 ‘교육공로자’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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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모살미수 징역 6년 경성지방법원 1912-09-2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모살미수 무죄(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3-03-2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모살미수 무죄(원판결 취소) 고등법원 1913-10-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5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6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7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징역 2년(원판결 취소),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은 각하(却下)함, 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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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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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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