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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32
성명
한자 申采浩
이명 尹仁元, 王國錦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6년 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로 출세하기 시작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 논설위원(論說委員)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논설 주필(論說主筆)로 일인의 폭행과 간계를 폭로하는 배일논진(排日論陣)을 펴서 독립사상(獨立思想)고취시킴

2. 1910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망명하여 해삼위(海蔘威)에서 대양보(大洋報) 권업신문(勸業新聞) 주필(主筆)이 되어 애국열(愛國熱)고취하였고 당시 북경(北京) 상해(上海)에서 조국 광복(祖國光復)을 위해 힘썼으며 삼일운동 후(三一運動後)임정 의정원 위원(臨政議政院委員)이 되었음

3. 북경(北京)에서 일경(日警)에 잡혀 15년징역을 선고받고 대련감옥(大連監獄)에서 복역 중 5년만인 1936년 2월 11일 옥중에서 병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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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했다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으며, 만민공동회 운동 때에는 간부급으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여 그 해 연말에 독립협회가 해산 당할 때 일시 투옥되었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향리에 돌아와 문동학원(文東學院) 등에서 신교육에 종사하였다. 1904년에는 신규식(申圭植) 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의 이웃에 산동학당(山東學堂)이라는 신식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 장지연(張志淵)의 요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이해 11월 18일에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가 이를 비밀에 부치자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기표하여 이를 폭로 규탄하자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었다. 이에 양기탁(梁起鐸)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기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 신문에서 자유롭게 필봉을 휘둘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성력을 다할 것을 계몽하였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의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그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신민회의 이념과 목표를 그의 논설 속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했으며, 신민회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십세기 신국민(二十世紀 新國民)」은 신민회의 이념을 국민에게 잘 천명한 대표적 논설이었다. 그 밖에도 합법단체로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에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했으며,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에도 다수의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국문 전용의 여성잡지인 『가영잡지』의 편집인이 되어 부인층의 계몽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계몽운동기의 『독사신론』(1908), 『을지문덕(乙支文德)』(1908),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 李舜臣傳)』(1908),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1909),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1910, 실전) 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을 수립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당시 문화계에는 존화사관에 젖은 중세유교사학과, 또한 일본 사학자들이 근대사학의 미명하에 『조선사(朝鮮史)』 등을 새로 저술하여 조선이 고대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 초기식민주의사관을 지어내어 퍼뜨리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위한 정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하여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통감하고, 격렬한 필치로 한편으로는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사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거짓 학설에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근대민족주의사관에 의하여 한국 역사를 새로이 체계화하는 위의 저서들을 저술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한 위대한 업적을 한국민족에게 바친친 것이었다. 1910년 4월에 신민회가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을 위하여 신민회 간부 일부를 망명시키게 되자, 그 일단이 되어 국외로 망명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 1911년 12월 이상설(李相卨) 최재형(崔在亨) 정재관(鄭在寬) 등이 중심이 되어 교민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게 되자 그 주필로 활동하였다. 『권업신문』을 통하여 이 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된 1913년까지 노령과 만주의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교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문필활동을 하였다. 또한 1912년 윤세복(尹世復) 이동휘(李東輝) 이 갑(李甲)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광복회의 회장은 윤세복이었고 총무는 이동휘가 맡았다. 광복회는 1910년대의 중요한 독립운동 단체로 국내외에서 1918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914년에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청소년들에게 국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조선사(朝鮮史)》(失傅)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여 그의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고 북경에 이주하여 국사연구와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성립된 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이승만이 2개월 전에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음을 들어서 이에 반대하고 퇴장하였다. 제2회 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되었다. 1919년 9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국민의회)와 한성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 임시정부의 노선을 취하였다. 1919년 10월에 상해에서 『신대한(新大韓)』지를 발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했으며, 남형우(南亨祐) 등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을 조직하여 그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에 『신대한』지의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이주하여 박용만(朴容萬) 등 동지 50여명과 함께 『제이회보합단(第二回普合團)』을 조직하고 그 내임장(內任長)을 담당하였다. 「제이회보합단」은 독립군단체 「보합단」을 계승한 단체로서 무장군사활동을 유일한 독립운동방략으로 채택한 독립운동단체였다. 1920년 9월에는 박용만·신 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여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의 통일과 독립운동 노선의 무장투쟁 노선에로의 통일을 추구하였다. 1921년 1월에는 김창숙(金昌淑) 등의 지원을 받아 『천고(天鼓)』잡지를 창간하여 격렬한 필치의 언론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20년 4월에는 54명의 동지들과 함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공표하였다. 1923년 1월에는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31년 서울에서 간행),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30년 서울에서 간행)에 실린 논문들을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無政府主義 東方聯盟)」에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다 일제관헌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348면
  • 기려수필 258면
  • 명치백년사총서 제1권 분책 773면
  • 명치백년사총서 제2권 440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1권 3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2권 252·39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47·955·96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신채호 - 충남 대덕(大德) -
본문
1880년 11월 7일(음력) 충남 대덕군(大德郡) 산내면(山內面) 어남리(於南里, 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림(桃林) 마을에서 신광식(申光植)과 안동 권(權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 ・ 단생(丹生) ・ 일편단생(一片丹生)이다. 이름은 처음 채호(寀浩)였으나 뒤에 채(采)로 간략하게 표기하였다. 호는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에서 취하여 일편단생(一片丹生) ・ 단생(丹生)을 썼으나 뒤에 단재(丹齋)로 고쳤다. 필명으로 무애생(無涯生) ・ 금협산인(錦頰山人) ・ 연시몽인(燕市夢人) ・ 한놈 ・ 적심(赤心) 등을 썼다. 망명하여 독립운동기간에는 유병택(劉炳澤) ・ 유맹원(劉孟源) ・ 박철(朴鐵) ・ 옥조숭(玉兆崇) ・ 왕국금(王國錦) ・ 윤인원(尹仁元) 등의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집안은 본디 양반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빈한하였다. 증조할아버지 신명휴(申命休)는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는 18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6품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아버지 신광식은 신채호가 8세되던 1887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였다. 소년 시절, 할아버지 슬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9세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마치고, 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하였다고 한다. 1897년 할아버지의 소개로 수구파 대신 신기선(申箕善)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신기선의 충남 목천木川 본가의 서책을 빌려 읽으면서 유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1898년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 『독립신문』 ・ 『황성신문(皇城新聞)』 ・ 『제국신문』 등 근대 신문들과 신서(新書)들을 탐독하며 개화자강 사상에 젖기 시작하였다. 친러수구파 정부가 1898년 11월 5일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서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내무부 ・ 문서부의 간부급으로 활약하였고 만민공동회 참여를 전환점으로 개화자강파로 전환하였다. 한 달여 뒤인 12월 25일 고종(高宗)과 정부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하고 주동자 430여 명을 체포할때, 일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1901년 향리 부근인 청주군 낭성면(琅城面) 인차리(仁次里)의 문동학원(文東學院)에 강사로 나가면서, 시대 변천과 한문무용론(漢文無用論)을 주장하다가 유생들에게 배척당한 일도 있었다. 1904년 정부가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승인해 주려 하자 조소앙(趙素昻) 등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일제와 주모자 이하영(李夏榮)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그해 상반기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러나 『황성신문』이 일제의 을사늑약을 폭로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로 무기 정간당하자, 1905년 말 1906년 초 양기탁(梁起鐸)의 초청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가 되었다. 이때 그가 쓴 일제침략 비판 논설은 애국심에 넘치는 내용과 웅장하고 박력있는 필치로 바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켰다. 이후 국민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애국계몽 운동가중 한 사람으로 부상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가입하여 신민회 이념을 논설에 잘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으며, 신민회의 비공식적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07년 10월 량치차오(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번역 간행하였다. 이어서 한국역사상의 삼걸(三傑)로 을지문덕(乙支文德), 이순신(李舜臣), 최영(崔瑩)을 뽑아 전기를 저술하였다. 1908년 5월 『을지문덕』을 간행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5월 2일부터 8월 18일까지 『수군제일위인(水軍第一偉人) 이순신전』을 연재하였다. 1909년 12월 5일부터 1910년 5월 27일까지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을 연재하였다. 일반민중과 부녀층을 위하여 순국문판 『을지문덕젼』을 1908년 7월 펴냈고, 순국문판 『리슌신젼』을 1908년 6월 11일부터 10월 24일까지 국문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08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와 『대한협회월보』에 여러 편의 애국계몽 논설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부녀층 계몽을 위하여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순국문 잡지인 『가뎡잡지』를 편집 ・ 발간하였다.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였다가 후에 책으로 간행하였다. 『독사신론』은 확고한 근대민족주의 사관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설들을 다수 정립하여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하였다. 그밖에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를 저술하였으나 망명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1909년 신민회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창립하자, 「청년학우회 취지서」를 써서 적극 지원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가 일부 간부들을 국외에 망명시켜 독립군기지 건설사업을 담당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참여하여 망명길에 올라 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李相卨), 최재형(崔在亨), 정재관(鄭在寬), 이동휘(李東輝), 이종호(李鍾浩)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세복(尹世復), 이동휘, 이갑(李甲)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되었다. 회장은 윤세복, 총무는 이동휘가 맡았다. 광복회에서 통고문(通告文)과 고시문(告示文) 등을 작성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약 1년간 체류하였다. 1914년 대종교(大倧敎)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의 환런현(桓仁縣) 홍도천에 가서 약 1년간 체류하였다. 서간도에서 주로 독립운동근거지 답사,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 답사,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국사 교수, 『조선사(朝鮮史)』 집필 등을 하였다. 이때 지안현(輯安縣)에 남아 있는 제2환도성 유적과 광개토대왕릉 등 방대한 고구려 고분군들을 답사하였다. 1915년 이회영(李會榮)의 안내로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3 ・ 1운동 때까지 약 4년 체류하였다. 베이징에서는 주로 역사연구, 베이징 부근 조선고대사 유적 답사, 독립운동관계 논설 집필, 『중화보(中華報)』 ・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의 논설 집필 등의 일을 하였다. 1919년 2월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자 당시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다른 39명의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서명하였다. 베이징에서 3 ・ 1운동 소식을 듣자,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임시정부 발기회의인 ‘29인 모임’에 참가하였다. 발기위원으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에서 밤을 새워 토의한 결과 4월 11일 새벽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의결하는데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하의 각료조직을 구성할 때, 무장투쟁론에 의거하여 하와이에서 독립군을 창설한 박용만(朴容萬)을 국무총리 후보로 천거하였다. 반면 자신은 현창운(玄彰運)에 의하여 국무총리 후보로 천거되었다. 그러나 모두 부결되었다. 결국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3인이 국무총리 후보로 가결되었고 이 중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어 4월 22일 열린 임시의정원 제2차 회의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1919.7. 7~19)에서는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 위원장을 맡고, 충청도 의원으로도 선임되는 등 1919년 4월부터 7월까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1919. 8.18~9. 17)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제6회 회의는 상하이 임시정부 ・ 노령 국민의회(國民議會) ・ 한성 임시정부를 통일하여 통합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던 것이 주된 의제였다. 이때 안창호 등이 통합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하려고 하자, 일찍이 ‘위임통치안’을 제출한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李東輝)를 국무총리로 한 새로운 내각의 통합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출범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그해 10월 상하이에서 대통령 이승만 선출을 반대하는 신규식(申圭植), 남형우(南亨祐) 등과 함께 주간(週刊)신문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고, 주간(主幹)이 되어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고 일제를 격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40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하고 부단주(副團主)가 되어 단주(團主) 남형우와 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재정 사정으로 『신대한』 발행이 중단되자 1920년 4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징에서 박용만 등 5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제2회보합단(第二回普合團)’을 조직하고 내임장(內任長)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9월에는 박용만, 신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발기하였다. 1921년 1월에는 김창숙 등의 지원을 받고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하였다. 같은해 4월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물면서도 위임통치청원 사실에 대해 사과와 해명이 없음을 보고 격분하여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규탄 「성토문」을 작성한 뒤, 54명 동지들의 서명을 받아 임시정부에 보내고 공표하였다. 이어 박용만, 신숙 등 동지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였다. 1922년 12월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의열단(義烈團)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 집필을 간곡히 요청받았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선언문을 집필하면서 김원봉이 합숙시킨 유자명(柳子明)으로부터 의열단의 혁명이념과 함께 무정부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명 듣게 되었고, 그 결과 민족주의와 함께 무정부주의 요소가 집필에 반영되었다. 1개월 여의 산고(産苦) 끝에 1923년 1월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이라는 노작(勞作)을 완성하였다. 이 글은 내용과 문장 모든 면에서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을 감격시켰다. 「조선혁명선언」은 강도 일본이 조선의 국호 ・ 정권 ・ 생존의 필요조건을 모두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므로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고, 동시에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에 대해서는 ‘혁명’으로 살벌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임을 웅장한 필치로 선언하였다.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하이에서 70여 독립운동단체 대표 124명이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재정 ・ 군사 ・ 외교분과위원회의 결의안까지 토의하여 통과시키고, 현 임시정부의 대통령불신임안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 또는 임시정부를 완전히 부정하고 러시아 ・ 간도 등지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개조파’와 ‘창조파’가 분열되었다. 이때 창조파를 지지하여 러시아나 만주에 무장투쟁을 독립운동 방략으로 하는 망명임시정부를 새로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개조파는 5월 23일부터 회의에 전연 출석치 않음으로써 사실상 국민대표회의는 분열되었다. 창조파는 단독으로 1923년 6월 7일 회의를 열어 새로운 헌법과 국호 ・ 연호를 제정하였다. 또한 입법부인 국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윤해(尹海) 등 33명을 위원으로 선출하였고 행정부인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행정수반으로 선출하였으며 박은식, 신채호, 이동휘, 문창범 등 30명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김규식을 행정수반으로 한 창조파의 새로운 ‘임시정부’는 1923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한 소련 정부는 자기 영토내에서의 한국인 ‘임시정부’의 활동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창조파 독립운동가들을 일시 경찰서에서 구금하였다가 석방하였다. 이에 창조파의 새로운 ‘임시정부’는 자연히 해산되었고, 독립운동가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정신적 충격과 좌절에 빠져 베이징으로 돌아와서는 1924년 3월 승려가 되려고 베이징 교외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갔다. 승려생활 중에 주로 시작(詩作)을 하다가 1924년 여름부터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국사 연구를 위해 6개월간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1924년 가을 속세로 돌아왔다. 1924년 가을부터 1925년 말까지 이전 원고들을 수정하고 중국 내 문헌들을 조사하면서 본격적인 국사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 중 1924년 이룬 국사 연구상 큰 업적 중 하나는 『조선사(朝鮮史, 朝鮮上古史)』 총론을 완성한 일이었다. 대체로 총론은 원고의 마지막에 쓰는 것이 관례이므로, 본문의 원고는 이미 그 이전에 쓴 것이라고 본다면,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는 1924년 완성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총론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그의 유명한 민족주의 사관을 극명하게 이론화하여 천명하였다. 1924년 1월부터 3월까지 『동아일보』에 다수의 역사 연구 논문들을 연재하였는데, 이 논문들은 그후 그가 투옥된 다음 1930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묶어져 간행되었다. 이 무렵 무정부주의 잡지 『신세계』에 게재된 크로포트킨과 다수의 중국 무정부주의자의 논문들을 읽고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4년 「문제없는 논문」에서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비치기 시작하였고, 1925년에 쓴 「낭객(浪客)의 신년만필」에서는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짙게 나타났다. 그는 이 글에서 인류의 5대 사상가로 석가 ・ 공자 ・ 예수 ・ 마르크스 ・ 크로포트킨을 들고 있으며, 『동아일보』의 독자들에게 “아아! 크로포트킨의 「청년(靑年)에게 고告하노라」란 논문의 세례를 받자!”라고 권고하였다. 이에 1926년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1927년부터는 무정부주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9월 중국 텐진(일설에는 베이징)에서 중국 ・ 조선 ・ 일본 ・ 대만 ・ 안남(베트남) ・ 인도 등 6개 민족 대표 120여 명이 모여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을 조직하려 하자, 대만인 무정부주의자 린빙원(林炳文)의 안내로 이필현(李弼鉉, 일명 李志永)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1927년 홍명희(洪命熹)와 안재홍(安在鴻)의 편지 요청을 받고 고국에서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무정부주의 작품으로서 「대흑호(大黑虎)의 일석담(一夕談)」 「용(龍)과 용(龍)의 대격전」 등을 썼다. 1928년 4월에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하고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잡지 또는 신문)을 설립할 것과 일제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한 폭탄제조소 설치를 결의하였다. 회의 후 잡지 발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해 5월 8일 유병택(柳炳澤, 일설 柳孟源)이라는 가명으로 타이완 지롱(基隆)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상륙하던 중 지롱수상서원에게 체포되어 다롄(大連)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첫 공판이 열리기까지 7개월간미결감에 수감되었다. 함께 체포된 대만인린빙원은 일제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8년 8월 옥사할 정도로 조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30년 4월 28일 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중사상범으로 독방에 수감되었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추위였다. 원래 어려서부터 병약한 그에게는 추운 북방의 뤼순(旅順)의 날씨와 감옥의 시멘트 바닥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웠다. 이에 끼니를 굶고 있는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옷에 솜을 많이 놓아 두툼하게 하여 보내 달라”고까지 하였다. 1935년부터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자신이 옥중에서 죽게 될 것을 예감하기 시작하였다. 뤼순감옥에서 건강이 악화된 후 홍명희에게 편지를 보내 『대가야천국고(大伽倻遷國考)』와 『정인홍약전(鄭仁弘略傳)』 등 두 개의 구상된 원고가 자신의 죽음과 함께 땅에 묻힐 것을 애석해 하였다.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서울에 있던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16세)은 “신채호 뇌일혈,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장례절차를 준비하여 다롄으로 향하였다. 가족들이 뤼순감옥에 도착해 면회를 하였을때, 의식불명인 채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일제 간수들은 면회시간이 지나자, 부인과 아들은 간수에게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임종을 지켜보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간수들은 규칙을 내세워 가족들을 쫓아냈다.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 위에서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채 홀로 생을 마쳤다. 저술로는 1908년에 『독사신론(讀史新論)』, 『을지문덕(乙支文德)』,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1909),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10년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1924),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20년대 논문집, 1931) 등 다수가 있다. 번역서로는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이 있다. 전집으로는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편찬한 『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3책, 을유문화사, 1972), 『개정(改訂) 단재신채호 전집』(4책, 형설출판사, 1977), 『단재신채호전집』(9책,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간행, 2007)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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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북도 청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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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2 사당 단재영당(기념관) 충청북도 청주시
3 생가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대전광역시 중구
4 동상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충청북도 청주시
5 동상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경기도 과천시
6 사적지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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