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16세의 나이로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재학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보고 민족 독립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기회에 민족의 의사가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이러한 때에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파견된 제3대의 결사대원 임용일(林龍日)·이학필(李學弼)·김응식(金應植) 등 세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미국의원단에게 독립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만세시위를 다시 일으켜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독립 희망의 열렬함을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여 구체적인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결사대원들이 다시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사람은 선천군청으로 가서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투탄하였으나 불발하였고, 그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로 가서 이학필이 밖에서 망을 보게 하고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일단 피신하였다.
그 최급경고문에는 '적국의 관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천하의 대의(大義)와 국가의 위급을 위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분투하거늘 너희는 원수의 매(鷹)와 개가 되어 도리어 같은 동포를 해하니 너희가 만일 지금에 그만두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으면 사정없는 벽력의 불이 너희 머리 위에 떨어질 터이니 너희는 일찍이 주의하여 한편으로 너희 목숨을 보전하고 한편으로 너희 자손을 위해 속속히 사직하고 나오라'하였으며, 다른 격문에는 '재산가의 의연(義捐)을 청함'이란 내용으로 그 끝에는 '대한민국 2년' '광복군총영'이라는 서명 날인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동지 20여명과 함께 9월 7일까지 모두 체포되었으며, 근 1년간 재판끝에 1921년 7월 2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돌연히 일어서서 두손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크게 소리치며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고 하여 방청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결국 1921년 9월 30일 평양감옥에서 '나는 다만 조국을 위하여 죽을 따름이다'고 말하며 성경을 외우고 찬송을 부른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6·217면
- 박은식전서 상권 66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49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32면
- 기려수필 296·30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9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04·105·178∼184·640·644·648·649·650·6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