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영덕 (盈德) 에서 김재서 (金在瑞) 등과 더불어 창의군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으로 추대된 후 청하 (淸河) ·영덕 강구 (江口) 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둔소를 습격하고 적군 다수를 사살 하고, 1907년 4월 정용기 (鄭鏞基) 의 산남의진 (山南義陣) 이 결성되자 이에 합세하여 유격장 겸 도총장 (都總將) 으로 임명되어 청송 (靑松) , 영천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을 격살, 1907년 12월 정용기 의병대장이 전사한 후 그의 부친 정환직 (鄭煥直) 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장 (總將) 이 되어 청송, 청하, 영덕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안평 (安平) 전투에서 체포되어 1910년 7월 25일 징역 10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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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영덕(盈德)에서 김재서(金在瑞) 등과 더불어 창의군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으로 추대된 후 청하(淸河)·영덕 강구(江口) 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둔소를 습격하고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1907년 4월에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이에 합세하여 유격장 겸 도총장(都總將)으로 임명되어 청송(靑松), 영천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을 격살하였다.
또한 1907년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흥해(興海)지방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7년 12월에 정용기 의병대장이 전사한 후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장(總將)이 되어 청송, 청하, 영덕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1910년 봄에 해산상태에 처해 있던 옛 산남의진을 다시 정비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고 무기를 획득하여 청송, 의성 등지의 일수비대를 공격하였으며, 안평(安平) 전투에서 체포되어 1910년 7월 25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1·389·390·579면
- 산남창의지 하권 73면
- 재판문 1910.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