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경복중학교 재학중 1939년에 동교생 이현상(李賢相)·장의찬(張宜燦)·명의택(明義宅)·주낙원(朱樂元)·성익환(成益煥)·홍건표(洪建杓) 등과 동지가 되어 조국광복을 위해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동지포섭 등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후 목적완수를 위해 계획을 진행하다가 1941년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하고 동지들도 각각 전문학교에 진학하게되자 이들은 동년 가을에 당시 봉래동(현재 만리동)에 있던 주낙원의 집에 모여 정식으로 항일학생결사인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고 부서 및 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정하였다.
기본강령으로는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 절대비밀, 책임완수 등을 정하였으며 이때 그는 남상갑과 함께 자금책의 일을 맡았다.
이들은 우선 실천행동 방략으로써 친일파 처단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일인이 밀집하여 살고있는 당시 욱정(旭町 : 현재 남산동 부근)일대를 방화하여 일인을 섬멸하는 계획도 세웠다. 또한 이들은 일제의 패망과 조국광복이 가까왔음을 알리는 격문을 각처에 뿌려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는데 그는 남상갑(南相甲)과 함께 격문의 문안을 맡았다.
한편 흑백당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교련용 38식 소총 2자루와 실탄 및 총검을 빼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43년 10월에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학생 김창흠(金昌欽)이 귀향열차 안에서 우리말로 일제를 욕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가택수색을 당하였는데 이때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됨으로써 흑백당의 조직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당원들은 긴급모임을 갖고 국내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었으므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당원들은 일단 당원 김성근(金盛根)의 자형이 있는 만주의 신민(新民)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1943년 12월초부터 1~2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는데 그는 명의택과 한 조를 이루어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에 의해 그를 비롯한 선발대원은 1944년 1월경 만주의 북경·심양(瀋陽)·신민(新民)·승덕(承德) 등지에서 전원이 붙잡혀 국내로 이송되었다.
붙잡힌 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001∼100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