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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292
성명
한자 朴昇煥
이명 朴星煥, 朴勝煥, 朴齊寬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7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07년 8월 1일 역적들의 흉계로 군대의 공수훈련을 실시하고 갑자기 해산명령을 내리자 미리 이것을 짐작한 제1연대 제1대대는 훈련원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군대해산했다는 말을 듣고 비분을 참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하였음.

2. 이것을 본 다른 군대들도 들고 일어나 마침내 왜군과 싸우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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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서울 반촌(泮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용(智勇)이 뛰어나 군대에 복무한지 10여년에 육군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격하여 일본인에게 보복하고자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19일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킬 때에도 그는 궁중에서 거사하여 이를 제지코자 했으나 화가 황제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중단하였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 양위시킨 후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하기 위한 준비조치로 한국군의 강제 해산을 추진하였다. 일제와 이완용 내각은 1907년 7월 31일 「군대를 해산한다」는 순종의 조칙을 만들어 놓고는 군대의 저항과 봉기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극비에 부치고 선포하지 못한 채 먼저 한국군의 탄환을 여단사령부에 거두어들이도록 비밀 훈시를 내리었다. 8월 1일 새벽에 일제는 통감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한국군의 각 연대장과 대대장을 모아 놓고 「한국군을 해산한다」는 순종의 조칙을 낭독하고 군대해산식을 거행하겠으니 동일 오전 10시에 전 부대를 훈련원에 무기를 휴대하지 말고 집합시킬 것을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가 명령하였다. 여단장 양성환(梁性煥)을 비롯한 장령들은 비분함을 참을 수 없었으나 칙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일본군이 4면을 포위하고 있어서 어찌할 수 없이 병영으로 돌아왔다. 일제는 한국군이 훈련원에 집합하는 동안에 일본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의 영문을 점령하여 대비케 하였다. 한국군 장병들은 1907년 8월 1일 오전 10시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서 곡절도 모르고 훈련원에 집합하니, 무장한 일본군 보병과 기병이 포위한 가운데에서 일본군과 한국군 수뇌들이 늘어서서 해산을 명하고 은사금이라고 하여 하사관에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사에게 50원, 1년미만 근무한 병사에게 25원을 주며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한국군 장병들은 그제야 집합한 까닭을 알고 통곡을 하며 은사금을 땅에 던지는 등 비분강개했으나 맨손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던 참령 박승환은 병을 칭탁하고 대관정의 모임에 나가지 않고 중대장을 대리로 보냈었는데, 군대해산의 명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하여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어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오 적신이 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하고 통분한 나머지 대대장실에서 몇 자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의 유서에는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고 씌어 있었다.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의 총성은 부하장병들에게 봉기를 호소한 것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장병들이 대대장의 자결을 온 부대에 전하니 부대 장병들이 분기 격발하여 바로 탄약고를 부수고 탄환을 꺼내 와 무장 봉기하였다. 제1연대 제1대대의 봉기소식을 들은 제2연대 제1대대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해서 한국군 장병들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전투에 들어가고, 전투 후에는 상당수가 의병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박승환은 자결하여 대한제국 최후의 군인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군대 봉기에 의한 의병운동의 대대적인 파급의 전기를 만들어 준 위대한 순국을 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6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2 4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68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39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84면
  • 고등경찰요사 4면 무장독립운동비사 6면
  • 기려수필 120 121면 박은식전서 상권 32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승환 성환(性煥), 자: 구여(九如), 호: 운파(雲坡) 서울 -
본문
1869년 9월 7일 서울 반촌(泮村)에서 아버지 주표(洪周杓)와 어머니 남양(南陽) 홍씨 사이의 3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구여(九如), 호는 운파(雲坡)이다. 어려서 양주(楊州) 목사를 지낸 외숙 홍태윤(洪泰潤)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외숙의 영향을 받아 궁술 ・ 총사격 등 무술을 중시하여 연마하였다. 1887년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1895년 8월(음력) 일제가 명성황후(민비) 시해의 만행을 일으키자, 통분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근대무력 양성을 절감하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받아 나라를 지키는데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96년 1월 11일 『무관학교관제』가 반포되고 사관생도를 모집하자, 그는 그해 9월 28일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신식군대 장교훈련을 받았다. 1897년 3월 21일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참위(參尉, 소위)에 임관되었다. 당시 왕실은 1896년 2월 11일 일제의 침독(侵毒)을 피하여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들어가 정무를 보다가,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자, 왕실 호위 강화를 위해 1897년 3월 시위대(侍衛隊)를 개편 강화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교로 선발 배치되었다. 1899년 11월 11일 육군 부위(副尉, 중위)로 진급되어, 시위 제1연대 제2대대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1900년 7월 23일 육군 정위(正尉, 대위)로 승진하여 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으로 전임되었다가, 같은 해 8월 14일 다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1904년 2월 15일 육군 참령(參領; 소령)으로 진급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일제는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같은 해 11월 18일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 조약체결권자인 광무(고종)황제가 끝까지 서명 날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불법으로 이 늑약이 체결된 것처럼 강제하여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 1일 일제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육군 참령으로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광무황제는 이 기회에 황제가 ‘을사조약’ 강요에도 서명날인하지 않아서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며 을사조약은 무효이므로 일제의 외교권 침탈은 불법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偉鍾) 3특사를 헤이그에 파견하였다. 일제는 이 ‘헤이그밀사사건’을 악용하여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를 강제로 양위시켰다. 일제는 이완용 내각에 강요하여 7월 24일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해서 대한제국 정부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소위 ‘차관통치’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완전 식민지로의 강점 공작을 강행하였다. 광무황제 양위식 날인 7월 20일 휘하 장병을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내쫓고 광무황제의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화(禍)가 광무황제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중단하고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가 속한 시위대 지휘관들은 경운궁으로 진주해서 광무황제를 호위함으로써 황제의 양위식 출석을 막아 양위식을 무산시키려 했으나,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가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제보했기 때문에 이것도 실패하였다. 양위식은 광무황제와 융희황제의 참석없이 일제에 의해 강행되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앞장선 광무황제 양위반대의 격렬한 시위가 서울시내에서 일어나서 종로의 순사파출소를 습격하고 일본 군경을 공격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완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군사적으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두려고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의 배치 상황은 서울에 시위대(侍衛隊) 제1연대(3개 대대)와 제2연대(3개 대대)가 있었고, 지방에는 진위대(鎭衛隊)의 명칭으로 8개 대대를 수원 ・ 청주 ・ 원주 ・ 대구 ・ 광주 ・ 해주 ・ 안주 ・ 북청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각 진위대 아래 분대(分隊)를 주요 지방에 파견 주둔시키고 있었다. 1개 대대는 약 500~6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의 준비로 다음 기준의 비밀각서를 이완용 매국내각에게 통보하였다. ① 육군 1개 대대만 존치하여 황궁경호에 임하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 ② 군부를 비롯하여 육군에 관계되는 기관을 모두 폐지한다. ③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한국군에 필요한 자를 제외하고 일본군에 복속시킨다. ④ 해산한 하사와 병졸 가운데 경찰관 자격이 있는 자는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는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하게 하거나 둔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킨다 일제의 이 기준계획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황궁호위 1개 대대만 남겨두고 서울 시위대의 2개 연대와 지방 진위대 8개 대대를 모두 해산하며, 남겨진 황궁호위 1개 대대도 장교는 일본군에 복속시켜 일본군이 지휘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단숨에 강점하려는 날강도의 간책이었다. 일제는 이완용매국내각에게 7월 31일부터 대한제국 군대에 금족령을 내리게 하고, 일본군을 서울시내와 전국 각 지방에 증파시킴과 동시에 한국군 탄약고를 모두 접수하였다. 그 다음, 주한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를 앞세우고 창덕궁 융희황제(순종)를 알현하여 작성해 간 『군대해산조칙』에 서명하도록 협박해서 재가를 받아내었다. 하세가와는 이튿날인 8월 1일 아침 7시 군부대신 이병무, 시위대 여단장 양성환(梁性煥), 참장 이하 각 연대장 ・ 대대장, 기병, 공병대장 등을 하세가와 관저에 긴급 소집해 놓고, 군부대신에게 융희황제의 『군대해산조칙』을 낭독케 하였다. 하세가와는 사색이 된 대한제국 육군 장교들에게 이번 해산대상에서 장교는 제외하여 그대로 존속시킬 뿐 아니라 은사금도 지급할 계획이니 동요하지 말고 병사만 해산시킬 것이니, 8월 1일 10시 훈련원에서 열 예정인 해산식에 ‘군대해산’은 비밀에 부치고 ‘맨손 체조훈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을 총을 휴대하지 말고 집합시키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8월 1일 아침 7시 하세가와의 긴급소집에는 응하지 않고 중대장 김재흡(金在洽)을 대리참석시켰다가, 김 중대장의 긴급보고로 군부대신의 『군대해산조칙』 낭독과 10시 군대해산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라가 망해감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여 대성통곡하였다. 그는 ‘군대해산’의 사실과 ‘국가존망의 위기’를 병사들에게 알려 그들의 애국심 ・ 충성심으로 일제에 대항하고 조국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대한제국 시위대 병사들은 ‘맨손체조훈련’이 있으니 10시에 훈련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을 받고 비가 내리는 속에서 운동복 바람으로 집합하였다. 그들은 빈손 상태에서 대한제국 『군대해산』의 기막힌 조칙 낭독을 듣고 경악하였다. 일본군과 한국군 수뇌들은 늘어서서 해산을 명하고 은사금이라고 하면서 하사관에 80원, 1년 이상 근무 병사에게 50원, 1년 미만 병사에게 25원씩을 주면서 각자 귀가하도록 명령하였다. 병사들은 분개하였으나 손은 맨손이고, 무기고는 이미 봉쇄되어 일본군들이 지키고 있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서 국가존망의 위기에 부하장병들에게 최후의 결의를 보이기 위해,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번 죽어 아깝지 않다(軍人不能守國 臣不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써놓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이것은 살신성인의 자결로써 부하 장병들에게 목숨을 바치는 항일무장투쟁을 명령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부하 장병들이 총소리에 놀라 대대장실에 뛰어 들어가 보니 이미 순국해 있었다. 이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을 들고 봉기하였다. 제1연대 제1대대가 봉기했다는 통보를 받은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견습 참위 남상덕(南相悳)의 지휘 아래 봉기하였다. 봉기한 대한제국 육군 병사들은 병영을 미리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과 8월 1일 오전 11시 40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다음 시가지로 나와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서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 서울의 봉기한 시위대 군인들은 탄약이 떨어져 더 이상 시가전을 벌일 수 없게 되자 시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성 밖으로 나가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서울 시위대 봉기의 소식을 들은 지방 진위대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8월 5일 원주(原州) 진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여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의 지휘 아래 시민들과 함께 봉기해서 원주읍을 점령하고 우편국 ・ 경찰서 ・ 군청 등을 습격하여 무기고를 열어서 무장을 강화하여 의병부대로 전환하였다. 또한 여주(驪州) 분견대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여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도처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면서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뒤이어 8월 9일 수원(水原) 진위대 소속 강화(江華) 분견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그들은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과 연기우(延基羽) 등의 지휘 아래 주민들과 함께 약 600명이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하고 강화읍을 점령한 다음, 일진회(一進會) 회원인 친일파 군수를 처단했으며, 찾아온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여 물리치고 경기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청주(淸州) 진위대 소속 홍주(洪州) 분견대의 48명 전체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대구(大邱) 진위대 소속 진주(晉州) 분견대와 안동(安東)분견대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북청(北靑)진위대의 일부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개별적으로 의병에 합류하였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군대해산 즉시 봉기하지 않은 경우에도 귀가 후 다수 군인들이 지방 의병부대에 들어가 민간 의병들을 지휘하면서 의병으로 전화되었다. 군대해산 후 군인들의 봉기와 의병으로의 합류로 항일 의병전쟁이 1907년 8월 1일부터 1909년 10월까지 최고조의 고양기에 들어가서 일제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일제의 식민지 강점을 일정기간 지연시켰다. 이 성과의 최초의 신호탄은 1907년 8월 1일 아침 박승환 참령의 고귀하고 순결한 ‘유서’와 장렬한 자결 순국의 봉기명령 신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나라가 완전히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된 엄중한 사태에 직면하여 죽음을 각오한 무장봉기를 시사 명령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함으로써, 해산군인들로 하여금 즉각 무장봉기해서 한말 항일 의병전쟁을 비약적으로 고양시킨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살신성인의 애국군인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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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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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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