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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530
성명
한자 吉善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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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9 훈격 독립장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서 평생을 기독교(基督敎)를 통해서 민족자립운동을 강조하여 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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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기독교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길선주는 1919년 2월 14일 기홀병원(記笏病院)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이승훈(李昇薰)에게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여 경성으로 가서 독립운동의 협의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평양에서 여러 가지 활동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그의 도장을 이승훈(李昇薰)에게 맡겼다. 3월 1일 당일 길선주는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관계로 지체되었기 때문에 김병조(金秉祚), 유여대(劉如大), 정춘수(鄭春洙) 등과 함께 태화관(太和館)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도착한 즉시 곧바로 종로경찰서로 달려가 동지들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이후 길선주는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등으로 무죄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宗敎時報(1936. 1. 14)
  • pyengyang news(1936. 4)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6집 394~400면
  • 獨立宣言文(1919. 3. 1)
  • 豫審終結決定(京城地方法院:1919. 9. 1)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20. 8. 9)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10. 30)
  • 中外日報(1928. 6. 5)
  • 弔辭(宋鎭禹, 1935. 12. 3)
  • 豫審終結決定(高等法院特別刑事部:1920. 3. 22)
  • 東亞日報(1935. 11. 27·11. 28·11. 30, 12. 4·12. 5)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길선주 자 : 윤열(潤悅), 호 : 영계(靈溪) 평남 안주(安州) 3.1운동
본문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아버지 길봉순(吉鳳順)과 어머니 노복순(盧福順)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아명은 칠성(七星),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다. 4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한자를 배우고, 7세 때부터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1880년 신협(申協)의 외동딸 신선행(申善行)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1896년 기독교로 개종하고, 190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6월 제1회로 졸업하였다. 1885년 봄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의 거상 이재경(李在璟)의 상점에서 1년간 점원으로 일하고 이듬해 상점을 차려 운영하였다. 그러나 사업 부진과 건강 악화로 평양 용악사에서 잠시 휴양을 한 다음 1888년 여름부터 관우(關羽)를 신으로 섬기는 관성교(關聖敎)의 보고문(譜告文)을 얻어 독송하며 두루 도인(道人)을 찾아 관성교를 연구하였다. 1890년부터는 산간 암자를 찾아다니며 선도(仙道) 수련에 정진하여 심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신차력(身借力), 피와 기를 맑게 하는 수차력(水借力), 약을 조제하여 정력을 증강하는 약차력(藥借力)을 터득하였다. 1896년 봄 평양에 침술과 양약을 겸한 한방 약국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1896년 가을 기독교로 개종하여 평양 널다리골(판동)교회 영수(領袖)로 있던 친구 김종섭(金鍾燮)의 권유로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1897년 8월 미북장로회 선교사 그레이엄 리(Graham Lee, 李吉咸)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8년 봄 그 교회 영수에 임명되었다. 1899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를 설립하여 법무국장을 맡았다. 1900년 평양 장대현(章臺峴)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판동교회(板洞敎會)를 이전하여 장대현교회로 개칭하였다. 1901년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02년 조사(助事)를 맡았고, 황해도 평안도의 도조사(都助事)를 겸하였다.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던 무렵 『천로역정(天路歷程)』을 모방한 개종 소설 『해타론(懈惰論)』을 구상하여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07년 발행하였고, 이를 증보하고 삽화를 넣어 1916년 『만사성취(萬事成就)』를 간행하였다. 내용은 신자가 이 세상을 가리키는 소원성(所願城)을 떠나 성취국(成就國)을 거쳐 영생국(永生國)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1903년 생계 수단으로 운영하던 약국을 정리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와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부터 박치록(朴致錄)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평남 도사경회(都査經會)에 참여하여 6일부터 15일까지 저녁시간에 열리는 연합 부흥회에서 설교하였다. 이 회합에서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강력한 회개 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이를 교회사에서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의 주역으로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1907년 6월 20일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독로회)에서 서경조(徐景祚)·한석진(韓錫晉)·송인서(宋麟瑞)·양전백(梁甸伯)·방기창(邦基昌)·이기풍(李基豊)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고 평양 장대현교회를 담임하였다. 1908년 9월 제2회 노회에서 김찬성(金燦星)·송순명(宋淳明) 등과 함께 전도국 위원을 맡았고, 1909년 9월 제3회 노회에서 전도국장을 맡았다. 1912년 9월 장로회신학교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평북 선천(宣川)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로 있던 맏아들 길진형(吉鎭亨)이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길진형은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1914년 미국 유학 중 ‘105인 사건’ 때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18년 봄 귀국하여 3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때까지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정교분리 원칙’을 추종하며 목회 활동에만 전념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1919년 2월 7일경 중국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鮮于爀)의 내방을 받고, 국제 정세와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2월 14일경 이미 서울에 올라가 천도교계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합의하고 평양에 돌아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기홀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승훈(李昇薰)을 병문안을 핑계대고 찾아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승훈이 독립운동 계획을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권고하자 동참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4일 후 자신이 독립운동 계획을 설명한 안세환(安世桓)을 만나 날인할 때 쓰도록 새로 새긴 도장을 맡기고, 2월 21일부터 1주일간 1918년 12월 말경부터 예약되어 있던 황해도 장연읍교회 특별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사경회 인도 중이던 2월 27일 안세환이 보낸 박인관(朴仁寬)이 장연에 와서 거사 일이 3월 1일로 정해졌음을 알려주었다. 28일 장연을 떠나 사리원에서 1박하고 3월 1일 오후 6시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착해 보니 독립선언서는 이미 발표되고 서명자들은 다 체포된 상황이었다. 명의를 내고 도망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경무총감부에 자수하였다. 바로 수감되어 3월 2일 경무총감부에서 경찰의 신문을 받고, 3월 14일 검사의 신문을 받았다. 이때 “인민의 대표자가 되어 연서로써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독립의 청원을 하고 한편 독립청원서를 발표하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이승훈의 말에 찬동하고, “대표자로 명의를 게재할것을 승낙”하였다고 진술하고,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나는 극도의 근안(近眼)이고 또 몸이 불편하여 금후는 하지 않고 나는 정치상의 일에는 일절 관계하지 않기로 하였다”라고 답변하였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신문에서도 “3월 1일을 기하여 평양에서도 조선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른 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러한 일을 알지 못하고 지금까지 종교만 믿음으로써 정치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으나 시세가 변하여 와서 민족자결이라고 하는 것을 제창하였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독립 청원을 하는 일에 찬성하여 명의를 내었으나 이렇게 되었으니 독립은 세계에서 줄 것이라는 계획에 참여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답하고, “피고가 독립 청원을 한 것은 정부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있어서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아무 불평불만도 없고 단지 나는 속국된 데 있었으므로 독립국이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금번의 계획에 참여하였을 뿐이다”라고 답하였다. 이러한 답변은 3·1운동의 의미를 축소하려던 일제 당국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져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다른 서명자들과 달리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계시록을 애독하며 암송하였고, 『묵시록 강의』를 재정리하고 『말세학 강의』를 체계화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부터 장대현교회 사무는 부목사인 변인서(邊麟瑞)에게 맡기고, 전국을 대상으로 부흥 집회를 인도하며 종말론적 묵시신앙을 설교하였다. 이러한 현실 도피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설교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의 반발을 사 1926년 장대현교회 분규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추종 신도 500여 명을 장대현교회에서 데리고 나와 분립하여 이향리교회(履鄕里敎會)를 개척하였다. 그 후 이 교회는 신현리로 옮겨 신현교회(新峴敎會)로 개칭하여 말년까지 이 교회에 적을 두었다. 1927년 가을 원산 석우동(石隅洞)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사회주의 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피신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부흥회 인도를 멈추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며 설교와 강연을 하였으며, 설교한 내용은 1926년 2월 『강대보감(講臺寶鑑)』으로 출판되고, 1935년부터 1936년 사이에 『신앙생활』에 말세학으로 연재되었다. 1935년 11월 하순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평서노회 도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내출혈로 쓰러져 평양으로 옮겼으나 11월 26일 별세하였다. 장례는 장로교회장으로 12월 4일에 치르고 교회 공동묘지인 평양 서장대에 안장되었다. 장로교 초대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부흥운동가였다. 비록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 때문에 한말에는 국권 회복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일제의 종교 박해와 맏아들 길진형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정교분리 원칙’을 극복하고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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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무죄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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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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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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