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이경하(李景夏)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말 국내의 농업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많은 조선 농민들이 간도(間島)로 이주하여 농경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81년에 이르러 청국은 간도 지방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농민을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간도의 영유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1883년에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 略使)로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토문강(土門江)이 송화강의 상류인 도문강(圖們江)에 틀림없으므로 간도는 마땅히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여 이를 굽히지 않았다. 그후에도 조·청(朝·淸)간에 간도 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1900년에 이주 농민의 수가 6, 7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청국은 이들을 몹시 박대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를 두게 되었는데, 이때 이범윤이 그 직을 맡고 파견되었다. 1902년 6월 간도에 도착한 이범윤은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포대(私砲隊 일명 管理兵)를 조직하였다. 그후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은 노군측에 가담하여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패전하자 간도에 대한 일본군의 간섭이 잦아지고 1907년에는 드디어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가 생겨 이곳에서의 구국운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는 항일투쟁을 전개할 뜻으로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연해주에서의 활동도 용이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외교경로를 통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도 국내 사회주의 혁명 세력을 탄압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건 하에서 이범윤은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국내 침공 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이때 노령 연해주에 있어서의 한인들의 항일 무장 활동 기지는 연추(煙秋)였다. 1908년 이후 국내 의병 항쟁이 점차 북상하여 함남·함북 일대로 확산되자 이범윤은 창의회(彰義會)를 중심으로 광범한 모금(募金)·모병(募兵) 운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애국 동포와 청년들이 여기에 호응하여 30만원에 달하는 성금이 들어오고 4천 명 정도의 애국 청년들이 연추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곳 한인 부락에 유숙하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참모진은 러시아 당국에 교섭하여 노·일전쟁 때 쓰던 러시아군의 폐총 불하를 교섭하는 한편 간도 훈춘(琿春)의 청국 당국에도 무기 공급을 교섭하였다. 그러나 양국은 일본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이를 거절하였다. 의병 진영에서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있는 재력을 쏟아 무기상을 통하여 총기를 구입하는 한편 교포들이 소지하고 있는 총기를 거두어 무장하였다. 1908년 이들은 연추를 후방 기지로 하고 노·만 국경(露滿國境)에 위치한 합습마구(哈什馬溝)를 전초 기지로 하여 국내 침공 작전을 개시하였다. 총대장은 이범윤이었고 군자금을 댄 사람은 최재형(崔在亨)이었다. 최재형은 경흥(慶興) 출신이나 처음 빈손으로 연해주로 이주하여 돈을 모아 연추 굴지의 부호가 된 사람으로 블라디보스톡의 부호 최봉준(崔鳳俊)과 쌍벽을 이룬 사람이었다. 이범윤은 처음 노령으로 망명하여 연추에서 최재형이 세운 학교의 교사로 있었으며 거의한 후에도 계속 최재형의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1908년 4월 이후 산발적으로 도강 작전과 정찰 활동을 시도한 이범윤 의병 부대는 여름부터 본격적인 국내 침공 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작전방법은 부대를 1백 명 내외의 소단위 부대로 나누어 일군 수비대의 경비가 허술한 지점을 택하여 산발적으로 도강 상륙하고, 이와 같이 국내 침입에 성공한 각부대는 갑산(甲山)·무산(茂山) 등 예정된 지점에 집결하여 장기적이며 항구적인 국내 항쟁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1908년 여름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한 의병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7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10월에 이르러 대규모의 기습공격이 감행되었다. 대체로 550명의 의병이 이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두만강 연안의 일군 수비대를 공격하면서 한편 이미 국내로 침투한 의병들로 하여금 후방 지대를 교란케 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9월 23일 이범윤 부대의 경흥 일대 출몰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는 10월 17일 길주(吉州) 동남방 화대리(花臺里)에서 의병 50명이 성진(城津) 일군 수비대와 교전한 것을 보도하였고, 10월 15일에도 약 50명의 의병이 경성 주재 일군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을 하였다. 이러한 연해주 이범윤 의병 부대가 감행한 국내 침공 작전은 일군을 크게 당황하게 하였다. 일본은 두만강·압록강 일대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외무성을 통하여 한국 의병의 무장 해제와 체포·송환을 러시아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범윤 의병 부대는 그후에도 국내 침공 작전에 몰두하였다. 1909년에 들어와서도 대대적인 국내 침투를 기획하였다. 이범윤은 노령 각지의 애국 유지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노·일 전쟁 때 한국 전선에서 싸운 노군 퇴역 장교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침공작전을 펴려고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한국을 동정하는 이들 퇴역 장교들은 이범윤에게 예비병 4만과 총기·탄약을 대여하겠다고 제의하며 기병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제의는 러시아 당국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퇴역 장교들은 총기를 헐값으로 구입토록 주선하였다. 즉 5연발 총 한 자루에 탄약 4백발을 붙여 4원 50전으로 하여 몇만 정이라도 팔겠다고 하였다. 이범윤은 지방 유세를 하여 수만금을 모금하여 총기를 구입하는 한편 군자금도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이범윤의 부대가 국내로 침공해 온다는 소식은 1909년에 들어와 빈번히 나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대한 포부는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이들은 재침공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끈질긴 국내 침공 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투철한 항일투지와 아울러 무기의 우수성에 있었다. 이때 국내 의병들의 주무기는 화승총(火繩銃)이었으나 이곳 의병들이 소지한 무기는 노·일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사용한 소총이었다. 그들에게는 5연발, 14연발 등 각종 노국제 총기가 공급되었다. 더욱이 국내로 침공한 후의 탄약 보급을 위해 회령군(會寧郡) 용성부(龍城府)에 탄약 비밀 제조소까지 설치하고 제복도 러시아식 군복 차림으로 통일하고 털모자를 썼다. 또 그들은 러시아 퇴역 장교들로부터 군사 교련까지 받았다. 이러한 강력한 화력을 가졌던 이범윤 부대가 국내 침공 작전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항일 의병 투쟁에 대하여 노·일 양국측의 간섭과 탄압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큰 원인은 항일 독립 전선 내부의 모순 즉 지도층의 분열에 있었다. 이때 노령 연해주의 항일 독립 전선 내부에는 2개의 흐름이 있었다. 그 하나는 이범윤·최재형·엄인섭·안응칠(安應七, 安重根) 등의 연추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 항일 의병파(武裝抗日義兵派)요, 다른 하나는 블라디보스톡의 최봉준(「海朝新聞」창시자)을 중심으로 하는 해조 계몽파였다. 전자는 국내 의병 항쟁에 호응하여 무력에 의한 국권 회복을 강조하였고, 후자는 교육과 계몽 실업으로 민족적 실력을 배양하자는 계몽주의자들이었는데, 양자의 상극은 점차 짙어가 그 알력은 드디어 1909년 5, 6월경에 최재형에 의한 이범윤의 암살 미수 사건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후 1909년 9월에 일본이 안봉 철도 부설권과 간도를 교환하여 통감부 간도 출장소를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간도 일대는 의병 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고, 이와 아울러 내부 지도층의 모순 속에서도 연해주의 이범윤 계통의 의병들은 구국 무장 활동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1910년 전후까지도 국내 침공 작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육·언론을 통한 실력배양이라는 소극적 구국계몽 전략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무장 항일 독립 투쟁의 주도세력이 동간도(東間島)로 이동하여 적극 항쟁을 주장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이동해 갔다. 한편 이에 앞서 이범윤은 국내에서 일진회의 매국적 활동으로 한일합병설이 고조되자 유인석(柳麟錫)·김학만(金學滿)·차석보(車錫甫)·김좌두(金左斗)·김치보(金致甫) 등과 함께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격문을 지어 러시아·청국 각지에 체류하는 동포들에게 배부하였다. 또 의연금을 모금하여 그 돈으로 각국 정부에 전문을 발송하여 합병 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전격적으로 우리나라를 병합하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8월 26일 블라디보스톡 북쪽 '진고세'에서 교포의 지도급 인물 50여명과 회합했다. 이 모임에서 이범윤은 두만강이 언 뒤에 200명의 의병을 북한지방에 파견하고 총수 1만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여 결의되기도 하였다. 1919년초에는 39인과 더불어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그후 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풍(金淸風)·김현규(金鉉圭)·신 립(申立)·지우강(池雨江) 등과 같이 동만주 각지에서 산재한 의병을 규합하여 1919년 4월 만주 연길현 명월구(延吉縣 明月溝)에 근거를 둔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총재(總裁)에 취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평정관(評定官)이 되었다. 얼마 후 본부를 노령 신한촌(新韓村)에 두고, 중부를 왕청현(旺淸縣) 봉오동(鳳梧洞)으로 정하여 연길·왕청·화룡·훈춘 등지에 걸쳐 5개 중대의 병력을 분산 주둔시켰다. 이들은 적 기관파괴·적군사살·친일 주구배 숙청 등에 전력을 기울여 활약하였다. 이범윤은 본부 신한촌에서 무기알선·군자금 모금 등의 활약을 하였다. 다음해 6월 신한촌은 무장한 적색분자의 습격을 받아 애국동지 85인이 피살되었다. 1921년 여러 독립 단체의 힘을 집결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대한 독립군단'이 창설되었는데 여기에는 이범윤의 의군부, 광복단 등이 포함되었다. 서 일(徐一)이 자결한 후 이범윤은 대한 독립군단과 북로 군정서의 총재로 추대받았다. 1922년 대한 독립군단이 큰 타격을 받자, 김좌진(金佐鎭)·김 혁(金赫) 등이 힘을 합쳐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이범윤을 참의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신민부에서는 성동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무관양성에 힘썼으며, 이범윤은 그 고문이 되었다. 1926년 3월에는 러시아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공급받기로 계약하였다. 그후 만주·시베리아 지역에서 계속 활약하다가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01·341·409·410·5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652·790·791·820·8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51·156·185·190~196·234·236·3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58·69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30·216·232·238면
- 매천야록 53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02면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226·22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20·805·823·10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94·745·76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