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0월
1930년 8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5년 8월 29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에서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경상남도 각 지분국장(支分局長)이 모여 상설기관으로서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할 때 함안을 대표하여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9월 8일 함안공립보통학교동창회(咸安公立普通學校同窓會)에서 「문명의 건설에는 천재(天才)냐 근면(勤勉)이냐」를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서 근면 측을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10월 동아일보사 함안지국 기자로 채용되었으며, 1926년 7월 함안지국장이 되었다. 1927년경에는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 함안지국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25년 11월 29일 창립된 함안청년회(咸安靑年會)의 사회부 담당 상무집행위원, 1927년 7월 이후 집행위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1일 함안형평사(咸安衡平社) 제2회 정기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26일 양백(梁伯)·박동현(朴東鉉)·조문극(趙文極) 등과 함께 함안소작조합(咸安小作組合)을 창립하고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함안소작조합은 2,0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노동야학(勞動夜學)을 설립하여 농민들의 문맹퇴치에 주력하는 등으로 적극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13일 함안소년회(咸安少年會)를 창립하고 지도부(指導部)를 맡아 30여 명의 소년 회원을 지도하였다. 16일 함안농민회(咸安農民會)를 창립하고 박성창(朴性昌)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8월 함안농민회 주최로 개최된 농민문제 강연회에서 「노농대중(勞農大衆)아, 자각하라」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여,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모순과 불합리한 현실을 논리적으로 비판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5일 마산소년회(馬山少年會) 주최로 개최된 남조선소년현상웅변대회(南朝鮮少年懸賞雄辯大會)에 ‘불온’한 원고를 써주었다는 혐의로, 9월 1일 마산경찰서(馬山警察署) 고등계(高等係)에 붙잡혀가서 구류(拘留) 3일의 처분을 받았다.
그즈음 조형대(趙亨大)와 함께 신간회 함안지회 설립을 위한 임시집행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27년 10월 16일 신간회 함안지회를 설립하였다. 설립대회 당일 본부에서 안재홍(安在鴻)·홍명희(洪命熹) 등이 내려와 취지를 설명하고 조진규가 경과보고 및 규약낭독을 한 후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3.1운동 희생자 등을 거론한 조진규의 감상담(感想談)이 ‘불온(不穩)’하다는 이유로 경찰에 검속을 당하였다. 30일 이석건(李奭乾) 등과 함께 함안군 내 청년단체를 통일하여 함안청년동맹(咸安靑年同盟)을 창립하기 위한 준비위원에 선정되어, 11월 말 함안청년동맹을 설립한 후 임시의장·검사장(檢査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2월 25일 창립된 경남청년연맹(慶南靑年聯盟)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7월 20~21일 열린 정기대회에서 재무부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8월 함안상공회(咸安商工會) 제1회 총회에서 총무로 선정되었다. 함안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하던 1929년 6월 말경 청년동맹의 정책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위원장 강대시(姜大時)와 함께 붙잡혀갔다가 구류 10일 처분을 받았다. 7월 10일 동지들이 이들의 출옥 환영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이 역시 ‘심히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를 당하였다. 8월 14일 신간회 함안지회 집행위원회에서 서기장(書記長)·서무부장·전속상무(專屬商務)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2월 신간회 함안지회 정기대회에서 서기(書記)·서무부장·전체대회 대표회원 후보로 선정되었다. 이즈음부터 자주 서울의 신간회 본부로부터 통문(通文)을 접수받고 서울과 함안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1930년 3~4월 함안기자단(咸安記者團)을 창립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7월 최한익(崔漢翼)·조억덕(趙億德)과 함께 함안협동조합(咸安協同組合) 이사로 선정되었다. 20일 함안농민조합(咸安農民組合)을 대표하여 서울의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8월 5일에는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9월 20일 함안의 각 사회단체 연합위원회가 개최될 때 안창준(安昌濬) 등과 함께 함안청년동맹 측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2월 13일 신간회 함안지회 정기대회에서 검사위원장(檢査委員長)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함안지국장으로 활동하던 1931년 2월 1일 함안기자동맹(咸安記者同盟)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 25일에는 경남기자대회(慶南記者大會)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함안농민조합 간부로 활동하던 3월 19일, 함안의 지주·구장(區長) 등 유지들로 조직된 함안동회(咸安洞會)에서 미가(米價) 폭락으로 인한 피해를 머슴과 농업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에 대항하여 함안농민조합대회(咸安農民組合大會)를 개최하였으며, 21일에는 농성과 동맹휴업(同盟休業)을 감행하였다. 6월 함안농민조합의 쟁의부(爭議部) 의원이 되었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2월 함안농민조합의 함안야체이카 조직 혐의로 서울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고등계에 검속되었다가, 14일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32년 2월 21에도 10여 명의 청년과 함께 함안경찰서(咸安警察署)에 검속되어 박승표(朴承杓)와 함께 마산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3월 3일에 석방되었다. 31일에도 야학 활동으로 인하여 가택수색을 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5. 9. 3, 9. 8, 10. 26, 11. 14, 12. 4, 1926. 1. 6, 4. 27, 4. 29, 7. 12, 10. 28, 10. 30, 1927. 6. 10, 7. 23, 8. 20, 8. 23, 9. 4, 10. 20, 11. 2, 11. 17, 11. 24, 1928. 2. 29, 5. 2, 6. 22, 1929. 7. 25, 8. 19, 12. 17, 1930. 1. 16, 3. 31, 9. 24, 12. 18, 1931. 2. 5, 4. 7, 4. 29, 1932. 2. 26, 3. 9, 4. 3)
- 중외일보(中外日報)(1927. 1. 22, 2. 23, 2. 27, 5. 8, 5. 29, 7. 17~18, 7. 20, 7. 23, 1928. 2. 29, 7. 16, 7. 22, 8. 14, 1930. 7. 20, 7. 22, 8. 7)
- 조선일보(朝鮮日報)(1927. 10. 20, 1929. 7. 13, 8. 22, 12. 19, 1930. 3. 29)
- 중앙일보(中央日報)(1931. 12. 16)
- 사상문제(思想問題)에 관한 조사서류(調査書類)(7)
- 사상(思想)에 관한 정보철(情報綴)(2),(3),(10)
- 삼천리(三千里) 제9호(1930. 10. 1) 28면
-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경상남도경찰부, 1936) 80면
- 한국청년운동사(韓國靑年運動史)(선우기성, 1973) 385, 405면
- 부산·경남 삼일운동사(三一運動史)(삼일동지회, 1979) 599면
- 신간회연구(이균영, 1993) 596~597면
- 일제하농민조합운동연구(지수걸, 1993) 187, 190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463면
- 퇴우(退憂) 조진규(趙珍奎) 지사 추모비(1982.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