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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2641
성명
한자 金容圭
이명 金容奎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9 훈격 애국장
1919년 3월 6일,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전하며 광주(光州)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김강(金剛)의 의견에 찬동하여, 3월 8일과 9일 사이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 경고문(警告文), 독립가(獨立歌) 등을 수천 통 인쇄하고, 3월 10일 광주(光州) 남문통(南門通) 일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인쇄물을 반포하고 독립 운동 참가를 권유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궐석재판(闕席裁判)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923년경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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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용규는 1919년 3월 6일 밤 전남 광주군(光州郡)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 남궁혁(南宮爀)의 집에서 김강(金剛)·강석봉(姜錫奉)·김복현(金福鉉)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김용규는 동지들과 함께 김강으로부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광주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제안에 찬성하고 그 실천사항과 역할분담을 논의하였다. 이날 결의 내용은 첫째 3월 8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칠 것, 둘째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인쇄는 시내 조선인 청년에게 담당시킬 것, 셋째 인쇄용지 1만매는 강석봉에게 구매를 담당시킬 것, 넷째 인쇄용기는 숭일학교(崇一學校) 소장 등사판을 사용할 것, 다섯째 최병준(崔丙浚) 등은 숭일학교 학생을, 김태열(金泰悅)은 광주보통학교 학생을 각각 권유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시킬 것 등이었다. 이후 김용규는 동지들과 함께 남궁혁의 집에서 직접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를 담당하였다. 엄중한 일본경찰의 경계 등으로 인하여 인쇄소를 광주면(光州面) 수기옥정(須奇屋町) 김언수(金彦洙)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3월 8일 광주면 향사리(鄕社里) 최한영(崔漢泳)의 집으로 이전하여 다음날 9일 저녁까지 최정두(崔正斗)가 집에서 가져온 등사판 등을 이용하여 독립기(獨立旗), 구한국기(舊韓國旗), 경고문(警告文) 등 수천 통의 인쇄를 마쳤다.

이날 저녁 동지들과 회합하고 3월 10일 오후 3시 30분부터 광주 대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개시할 것을 알리고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물 배포, 집합시간 고지, 운동참가 권유에 관해 협의하였다. 김용규는 부동정(不動町) 방면 및 남문통(南門通) 일대를 담당하고 김종삼(金鍾三)은 당일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개시를 알릴 것 등을 협정하였다. 그리고 당일 배포할 독립선언서 등을 분배하고 흩어졌는데, 김용규는 독립선언서 인쇄물 50통을 받았다.

드디어 거사 당일 예정된 시간이 되자 김복현 등은 광주교(光州橋) 아래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 나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의 개시를 알렸다. 이에 호응하여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군중들과 함께 시장을 나와 숭일학교 학생 및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였고, 다시 시장에 모여 있던 수백 명과 합쳐 그 수가 1,000여 명을 넘었다. 이들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거나 모자 등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장을 출발하여 서문통(西門通)을 경유하여 우편국 앞을 쇄도하는 등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김용규는 이날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곧바로 몸을 숨겨 일경에 체포되지 않았다.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 궐석(闕席)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그후 1923년경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光州地方法院:1919. 6. 16)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용규 김용규(金容奎) 전라남도 광주(光州) 광주군 만세운동
본문
1898년 11월 16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광주면(光州面) 금정(錦町, 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광주 자혜의원(慈惠醫院)에서 간호원 조수(助手)로 일하고 있었다. 이명은 김용규(金容奎)를 썼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 주도자 중 한 사람이다.1919년 3월 6일 밤 광주군 내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 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남궁혁(南宮爀)의 집에서 뜻을 같이하는 지역 인사들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김복현(金福鉉)은 서울을 방문하여 직접 본 고종(高宗)의 인산(因山)과 만세운동의 전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물을 보이면서 광주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인쇄물을 등사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참석자들과 함께 이 제안에 적극 찬성하고 구체적인 시위 계획과 역할 분담을 논의하였다. 거사일은 3월 8일 장날로 정하였다.시위 준비 역할 분담에서 한길상과 함께 독립선언서 인쇄를 담당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로 선언서 인쇄 장소를 두 차례 옮기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3월 8일 새벽에 광주면 향사리(鄕社里) 최한영(崔漢泳)의 집으로 작업 장소를 옮겨 3월 9일 저녁까지 강석봉(姜錫奉)이 구매한 인쇄 용지 1만 장으로 숭일학교의 등사기와 최정두(崔正斗)가 가져온 소형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독립가, 태극기 등의 인쇄물 수천 통을 인쇄하는데 성공하였다.당초 거사일은 3월 8일이었으나 독립선언서등의 인쇄 완료 기간을 고려하여 3월 10일로 변경하였다.1919년 3월 10일 오전 광주 읍내 부동정(不動町)과 남문통(南門通)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 50여 매와 각종 인쇄물 수백 장을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를 나누어주고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어 예정된 오후 3시 30분 무렵 김복현 등과 함께 광주교 아래 강둑 소시장으로 내려가 그곳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 나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군중도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숭일학교 학생 및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여 시위 참가자의 수가 거의 1,000여 명을 넘었다. 시위대는 광주 읍내 서문통(西門通)과 우편국(郵便局) 앞, 그리고 본정통(本町通) 등에서 가두 행진을 벌이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에 의해 주도자와 시위대 100여 명이 체포되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당일 다른 주도자들과 달리 현장에서 빠져나와 붙잡히지는 않았다. 이후 3월 13일 광주면 북문통 도로에서 다시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김태열(金泰烈)을 만나 2차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3월 17일과 18일에는 박경주(朴京柱)의 집에서 박경주, 범윤두(范潤斗)와 함께 독립선언서 약 1,500통, 경고문(警告文) 약 1,500장, 독립가 약 500장을 인쇄하며 시위를 준비하였다.체포를 면했지만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闕席裁判)으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쫓기게 되었다. 1923년경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감옥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3년 광주지방법원 1919-06-1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남도 담양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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