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일제하 증산교(甑山敎)를 비롯한 종교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특히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측면이 강하여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전라도 고부 출신의 유생 강일순(姜一淳)은 1901년 전주 모악산 아래에서 흠치교를 창도하게 되었다. 이 종교의 주문에 '흠치흠치'라는 말이 있고,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이라고 되어 있어 '흠치교' 혹은 '태을교'라고 불렀다. 권영구는 1920년 음력 5월중 태을교(흠치교) 신자가 되어 8인조에 소속되어 포교활동을 하였다. 권영구는 엄격한 입교식을 거쳐 그의 상위자(上位者)로부터 1924년 갑자세(甲子歲)에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일제의 통치로부터 독립시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는 태을교 신자들이 모두 독립된 국가의 국민이 되고 그 자격에 따라 관직을 얻을 것을 굳게 믿었다. 권영구는 같은 영덕군의 권영도(權永燾) 등을 태을교에 포교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거두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치성비(致誠費)라는 명목으로 65원을 거두어 일부는 제사비로 충당하고 나머지 60원을 본부로 송부하였다. 태을교를 포교하던 권영구를 비롯한 태을교 신자들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권영구는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1921년 5월 16일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상소하여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21. 11. 26)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安東支廳:1921.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