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임원빈은 경기공립중학교 재학중이던 1940년 11월 3일 동기생 송택영(宋澤永)·신숙범(愼淑範)·김준회(金俊會)·박찬오(朴贊五)·임학수(林鶴洙) 등과 조국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인해방투쟁동맹(약칭 c.h.t)을 조직하였다. 동맹의 지도기관으로 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송택영·김준회와 함께 위원이 되었으며, 서기로 임학수를 선임하였다. 그리고 결사의 확대강화를 꾀하기 위해 세포단체를 조직하고 세포단체원은 동맹의 존재를 비밀로 하며 또 세포 상호간에 연락을 하지 말 것, 매월 제1 일요일에 회합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이후 김종윤(金鍾潤)·이이일(李二逸)·이정순(李廷順)이 가입하였고, 11월 11일 중앙위원회를 폐지하고 서기국·이론부·실천부를 설치하였다. 서기국은 박찬오·임학수·김종윤이 담당하고, 임원빈은 송택영·김준회와 함께 이론부를 맡기로 하였으며, 신숙범·이이일·이정순은 실천부를 맡았다.
11월 16일, 그는 ‘c.h.t대회의 선언’이라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기관지의 명칭을 『화선(火線)』으로 하였다. 11월 19일, 임원빈은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 2대 사상을 연구하고 그 모든 것을 파악하여 실천에 옮기는 연구 그룹을 조직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동지들과 계림공진회(鷄林共進會)라는 연구단체를 조직하여 기관지 『공진(共進)』을 발행하고자 하였다.
임원빈은 1941년 2월 15일에 체포되어 공판수속 진행 중 1942년 2월 16일 심신상실의 상태에 있으므로 공판 수속이 정지되었다가, 1942년 12월 2일에 징역 단기 3년, 장기 5년(미결구류 2년 통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4월 6일 급성심장마비에 의해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1940~1945년 학생운동의 성격변화(홍석률, 1991) 316~317면
- 決定文(京城地方法院:1945. 4. 19)
- 한국독립운동사사전(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6권 590~591면
- 일제말 전시파쇼체제하 학생민족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적 성격(변은진, 1996) 223면
- 刑事事件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