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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1470
성명
한자 金鳳性
이명 金鳳成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5 훈격 건국포장
1919년 2월 26일 신성(信聖)학교 강사 김지웅(金志雄)에게서 받은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선천(宣川)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징역 2년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징역 1년으로 감형(減刑)되어 1년 3개월(個月)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도미(渡美)후 193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귀국후 1933년 9월경(月頃) 동우회(同友會) 선천(宣川)지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7년 10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최종심에서 무죄(無罪)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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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선천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였던 이승훈(李昇薰)이 신성학교(信聖學校) 성경교사였던 홍성익(洪盛益)에게 3월 1일 신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부탁하며 추진되었다.

홍성익은 동료 교사인 김지웅(金志雄) 등과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신성학교 내의 업무는 김지웅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맡겼다.

당시 신성학교 4년생이던 그는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張日炫)·고병간(高秉幹)·박찬빈(朴贊彬) 등과 함께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를 신호로 그는 동교 학생들과 일제히 교문으로 뛰쳐나갔다. 사전 연락에 따라 옆에 있던 자매학교인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학생들이 천남동(川南洞) 시장에 도달할 무렵 시민들도 동참하여 시위군중은 1천명에 달하였다.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선천수비대와 경찰이 출동하여 발포를 감행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시위군중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는 상고 취지에서 일본이 내세우는 기만적인 동양평화의 허구성을 질타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잔학상을 지적하였다. 또한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비판하는 한편, 2천만 동포는 죽음으로 혈전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7월 12일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2년 쥬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를 졸업하였고, 1927년에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으며, 1930년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52∼85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442∼445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827면
  • 大韓抗日鬪爭總史(大韓抗日鬪爭總史編纂委員會, 1988) 134면
  • 判決文(高等法院, 1919. 7. 12)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1940. 8. 21)
  • 判決文(高等法院, 1941. 7. 21)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봉성 김봉성(金鳳成) 평안남도 강서(江西)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본문
1901년 3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동진면(東津面) 고일리(古逸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김봉성(金鳳成)을 사용하기도 했다. 안창호의 조카사위이자, 1952년 서울특별시 여자경찰서장을 역임했던 안맥결의 남편이다. 1919년 신성중학교 3학년 재학 중,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기독교인, 천도교인,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 양전백(梁甸伯) 목사는 2월부터 3·1운동 준비 과정에 참여하였다. 3월 1일 양 목사가 태화관 독립선언에 참여하자, 만세 시위의 실무는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하였다. 2월 28일 교사 김지웅(金志雄)은 학생들과 독립선언식 때 배포할 각종 문건과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김지웅에게 독립선언서 등사를 부탁받고 이에 찬동하여 만세 운동 준비 과정에 참여하였다. 3월 1일 12시, 신성학교 집회당에 교사와 학생들이 모였고, 교사 홍성익(洪成益)의 ‘한국 독립’에 대한 연설이 끝나자, 교사와 학생들은 태극기를 들고 선천읍 시내로 향했다.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도 합류했으며, 12시 30분경 읍내 중앙에 이르러, 학생 150~160명과 시민 300~400명을 합해 500~600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만세 행진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깃발을 앞세우고 진행됐으며, 사람이 점차 늘어나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선천군청, 선천경찰서 등으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으나, 선천철도원호대(宣川鐵道援護隊)의 착검 공격에 맨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일본 군인과 경찰의 공격으로 시위대는 흩어졌고, 이날 시위로 75명이 체포되고, 12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일로 일제에 붙잡혀 1919년 6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질타하고 동양평화론을 내세워 죽음으로써 혈전을 통한 독립 쟁취를 역설하며 상고하였으나,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출옥한 뒤 1922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했고, 1927년에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1월 시카고에서 흥사단에 입단하여 통상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8월 귀국하여, 9월 수양동우회 선천지부에 가입했고 11월부터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로 일했다. 1934년 안창호의 조카인 안맥결과 결혼하였고, 선천회관 운영을 책임졌다. 1936년 수양동우회가 관여하는 점진학교 교사로 청소년의 민족의식 함양에 힘쓰던 중,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선고되었으나, 1941년 11월 상고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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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7-12 국가기록원
2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1926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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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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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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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의정부)3ㆍ1운동 기념비 경기도 의정부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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