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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650
성명
한자 南炳世
이명 南東煥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9 훈격 대통령표창
1925년 2월 경북(慶北) 안동(安東)에서 경북청년대회(慶北靑年大會) 준비위원회 선전부 위원, 동년(同年) 8월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소속으로 예천(醴泉)시민 (對) 형평사원 만행사건 조사회 준비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8년 2월 신간회(新幹會) 안동(安東)지회 전형위원 및 간사로 활동하였고 1925년부터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안동(安東)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월 집행유예(執行猶豫) 4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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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남병세는 1925년 2월 경북 안동(安東)에서 경북청년대회(慶北靑年大會) 준비위원, 8월 안동청년연맹(安東靑年聯盟) 심사위원 등을 지내며 안동지역에서 항일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봄 안동군 일직면(一直面) 망호동(望湖洞)에서 김남수(金南洙)의 권유로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안동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해 여름에는 하성경(河成卿)의 집에서 안상길(安相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안동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이 무렵 안동의 사상단체인 화성회(火星會) 간부를 지내면서, 예천(醴泉)시민 대 형평사원(衡平社員) 만행사건 조사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8월 신간회(新幹會) 안동지회(安東支會)에 참여하여 연구부 총무간사가 되었고, 1928년 동회(同會) 안동지회 정기대회에서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남병세는 일경에 체포되어 1930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思想月報(朝鮮總督府 高等法院檢事局 思想部, 1931. 7. 15) 제1권 제4호
  • 신간회연구(이균영, 1993) 603~604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160면
  • 안동의 독립운동사(김희곤, 1999) 291, 314, 327면
  • 한국청년운동사(鮮于基聖, 1973) 360/370면
  • 新韓民報(1930. 3. 27)
  • 朝鮮日報(1928. 2. 1, 1930. 11. 11)
  • 東亞日報(1925. 2. 24, 8. 19)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30. 12. 27)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병세 이명 : 남동환(南東煥) 경상북도 안동(安東) -
본문
1898년 12월 23일 경북 안동군(安東郡) 일직면(一直面) 망호동(望湖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 이명은 남동환(南東煥)이다.1925년 2월 경북청년대회(慶北靑年大會)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으로서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경북 각지의 청년 대표들을 중심으로 그 해 3월 21일 대구청년회관에서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창립총회 당일 의장을 맡아 “대중해방의 선구가 되기를 기함”, “이론과 실지(實地)로서 역사적 사용을 완전히 함을 기함”이라는 동맹의 강령을 표방하는 등 회의를 진행하였다.같은 해 5월 16일 안동의 사상단체인 화성회(火星會) 제1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7~8월 무렵 계몽운동에 대한 표어 작성, ‘예천(醴泉) 시민 대 형평사원(衡平社員) 폭행 사건’ 조사회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1일 안동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안동청년연맹(安東靑年聯盟) 발기회와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총회 당일 위 예천 사건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는 등 이후 안동청년연맹을 중심으로 항일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또한 같은 해 11월 5일 김천(金泉) 금릉청년회관(金陵靑年會館)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경북청년연맹(慶北靑年聯盟) 발기회를 일제 경찰이 금지하자, 집회금지 철회를 위한 교섭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경북청년연맹 대회가 정식으로 개최되지 못하자 각지 대표들이 비공식적으로 만찬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경북청년연맹 설립을 위한 기성위원(期成委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1926년 봄 김남수(金南洙)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김남수를 책임으로 한 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여름, 연령 관계로 고려공산청년회 활동은 중단하였다. 동시에 안상길(安相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입당과 함께 안상길을 책임으로 한 야체이카에 소속되어 이후 평당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1927년 일직청년회(一直靑年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8월 26일 사립 보광학교(普光學校) 대강당에서 개최된 신간회(新幹會) 안동지회 설치대회에 참여하여 간사로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신간회 안동지회 정기대회에서 전형위원 과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을 계속하였다.이와 같이 1920년대 안동지역에서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다가 1930년 2월 25일 안동경찰서에 한때 붙잡혔다. 이때는 곧 풀려난 듯하였으나, 같은 해 7~8월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신간회 안동지회원 다수를 붙잡을 때 또 다시 붙잡혀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당시 이 사건은 안동뿐만 아니라 상주(尙州)·예천(醴泉)·영주(榮州) 등 경북 북부지방으로 확대되어 일제 당국과 언론에서는 이를 ‘경북공산당 사건’으로 다루었다.이후 1935년 5월 30일 일직면 내 유지들을 중심으로 면민(面民)의 체육 향상과 운동정신 양성을 위해 조직된 일직구락부(一直俱樂部) 창립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5월 24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10월 집행유예 3년 대구지방법원형사부 1930-12-2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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