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7년 1월경 경상남도 진주군(晉州郡)에서 이정기(李定基)가 파견한 이원기(李源祺)의 권유로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 진주지국장 조우제(趙佑濟)와 함께 ‘암살단’에 가입하였다. 이 조직은 장진홍(張鎭弘)이 1925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무기 등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온 이정기와 만나서 결성한 비밀결사이다.
김형갑은 중국에서 들어온 조재만(曺再萬)을 비롯해 조우제 등 10여 명의 동지와 서울·대구 등지에서 회합하며, 독립운동자금의 모집 방법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927년 들어 암살단에서는 장진홍을 중심으로 일제 고관(高官) 암살과 중요시설물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하고, 먼저 대구에서 거사(巨事)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목표를 경상북도 도청과 도경찰부 건물 그리고 조선은행 및 식산은행(殖産銀行) 대구지점의 네 곳으로 정하였다. 장진홍은 이미 1926년부터 다방면으로 폭탄 제작을 추진하여 경상북도 칠곡(漆谷)과 선산(善山)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烽火山)에서 성능을 실험하기도 했다. 1927년 10월에 먼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시도했다. 폭탄 3개를 폭발시켜 건물 유리창 수십 장을 파손하고 일본 경찰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1927년 12월 6일경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장진홍·이정기 등 다수의 동지는 도피했다가 1928년 10월 이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김형갑은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929년 5월 6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의 판결로 보석(保釋) 출옥하였다. 12월 9일에야 예심(豫審)이 종결되어, 면소(免訴)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1928)
- 집행원부(執行原簿)(대구지방법원:1929. 5. 6)
- 동아일보(東亞日報)(1929. 12. 28, 29)
- 조선일보(朝鮮日報)(1929. 12. 28, 29, 30)
- 매일신보(每日申報) (1929. 12. 29, 30)
- 기려수필(騎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352면
- 항일투사열전(抗日鬪士烈傳)(추경화, 1997) 2권 189면
- 부산일보(釜山日報)(1999.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