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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428
성명
한자 金仁秀
이명 金景泰, 金敬泰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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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8 훈격 애족장
1918. 10. 5 제주도(濟州島) 남제주(南濟州)법정사(法井寺)에서 김연일(金連日), 강창규(姜昌奎), 방동화(房東華) 스님 등이 주도한 항일 무력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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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濟州道) 남제주군(南濟州郡) 좌면(左面) 법정사(法井寺)에서 일어난 항일 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스님인 김연일(金連日) 등은 1918년 9월 19일, 신도 30명에 대하여, "왜노(倭奴)가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하였을 뿐 아니라, 병합(倂合) 후에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不遠)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나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商人)들을 도외(島外)로 구축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거의를 촉구하였다.

마침내 10월 5일, 신도 33명을 소집하여 김연일은 스스로 불무황제로 칭하고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으로 임명한 후, 김인수 등에게 각각 반수(班首)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김연일은 도대장 이하 군직을 명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각면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모인 항일봉기군은 400여 명이나 되었다. 김연일·김인수 등의 주도자들은 봉기군을 지휘하여 전선을 절단하고 서귀포(西歸浦) 호근리(好近里)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일경들이 미리 서귀포에서 무장한 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자, 김연일은 박주석에게 그곳에서 일경과 대치하도록 하고, 그와 김인수는 봉기군 일부를 데리고 중문주재소(中門駐在所)를 습격하였다.

주재소장 길원(吉原)은 갑작스럽게 닥친 봉기군을 방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주재소를 파괴·소각하고 일경 3명을 포박하였으며,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65·266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4卷 206面
  • 刑事事件簿
  • 受刑人名簿
  • 濟州抗日獨立運動史(濟州道, 1996) 143·149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인수 김경태(金景泰, 金敬泰) 경상북도 영일(迎日) -
본문
1898년 2월 2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동해면(東海面) 도구리(都邱里, 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경태(金景泰 또는 金敬泰)를 사용하였다.1914년 경북 영일군 출신인 김연일(金連日)이 신흥 종교인 태을교(太乙敎)의 지도자로서 제주도에 들어갈 때, 그의 조카로서 동행하였다. 1918년 4월부터 김연일을 비롯하여 제주도로 들어온 정구용(鄭龜龍)·장임호(張林虎)·김용충(金用忠)·김삼만(金三萬)·강민수(姜敏洙) 등과 함께 항일 무력 항쟁을 도모하였다. 8월 초에는 선도교(仙道敎) 지도자인 박주석(朴周錫)에게 법정사 비밀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하였다. 선도교와 태을교는 모두 강일순(姜一淳)을 교조로 모시는 신흥 종교였다.항일 무력 항쟁은 1918년 10월 4일부터 시작되었고, 10월 7일 새벽 법정사에 집결한 선봉대 33명은 서귀포 방면으로 무력 항쟁을 개시하였다. 이때 김연일, 김용충과 함께 법정사에 남았다. 선봉대는 도순리(道順里)·영남리(瀛南里)·서호리(西好里)·호근리(好近里)를 돌며 대오를 꾸렸다. 항쟁 대오를 이끌던 박주석과 강창규는 서귀포 습격을 중지하고 중문리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로 전술을 바꾸었다. 중문리(中文里)로 향하던 중 강정리(江汀里)와 도순리 사이에 있는 대천(大川) 연변에서 서귀포부터 제주성을 잇는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다. 하원리(河源里)에 이르자 항쟁 참가 인원은 400여 명에 달하였다.중문리에 이르러서는 경찰주재소장인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경찰 3명을 포박한 뒤 경찰주재소에 갇혀있던 13명을 풀어주었고, 주재소 건물을 불태웠다. 오전 11시 서귀포 경찰주재소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 오면서 항쟁 대오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법정사 항일 시위로 66명이 붙잡혀 31명이 실형을 받았고, 2명은 재판 받기 전에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전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 시위는 많은 구속자를 남기며 일제 하 제주도의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무력 항쟁이었다.무력 항쟁이 좌절되자 피신했으나 결국 11월 1일에 붙잡혀 구속되었다. 1919년 3월 1일 재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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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멸실 묘소가 재난 등에 의해 사라진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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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2 사당 의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3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4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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