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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고암면(高岩面) 계상리(桂上里) 계팔(桂八)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찬문(贊文), 호는 간취(澗翠)이다. 영남중파(嶺南仲波)에 속하는 유림으로서 김굉필(金宏弼)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본적인 계팔 마을은 서흥 김씨(瑞興 金氏)의 집성촌이다. 1919년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영남 지방 유림 중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경상도 지역 유림들의 서명을 받는 활동을 전개하였다.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월과 4월에 걸쳐 영남과 호남, 충청 지역의 유림이 펼친 독립청원운동이었다.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김창숙(金昌淑)은 당시 영남 유림의 종장이었던 곽종석(郭鍾錫)에게 그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유림이 중심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자고 제안한 것이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본격적인 논의는 3월 3일에 시작되었다.김창숙이 주도한 이날 회의에서는 이중업(李中業)·김정호(金丁鎬)·성태영(成泰英)·류준근(柳濬根)·윤중수(尹中洙)·유진태(兪鎭泰)가 각각 강원·충북, 충북·충남, 경기·황해, 전남·전북, 함남·함북, 평남·평북을 담당하여 서명자 규합에 협조하기로 결의하였다. 호남 유림의 종장 전우(田愚)와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척사(斥邪)의 기준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달리 했던 전국의 유림을 하나로 규합한 최초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파리장서는 영남 유림이 작성한 ‘곽종석본’의 내용에, 기호 유림이 작성한 ‘김복한본’의 서명자가 통합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서명자는 총 137명이었다. 이때 곽종석과 김창숙은 40세 이하, 지역에 따라서는 50세 이하는 되도록 서명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이는 일제의 탄압을 예상하여 젊은 유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서명자 명단에서 젊은 연령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그러나 파리장서에 서명하지 않았음에도 체포된 자가 80명에 이른다. 이들은 보통 파리장서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기획자나 서명자의 요청에 따라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1919년 5월 경 파리장서운동의 관련자로 일제 경찰에 지목되어 미서명자 80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대구 헌병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보안법 위반으로 혹독한 취조를 받고 5월 16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일제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지만, 그 후로도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1920년 2월 창녕 장날에 「통곡아팔역동포오주열강(慟哭我八域同胞五州列强)」이란 제목의 선언서를 작성하여 낭독하려다가 발각되어 다시 붙잡혔다. 이후 1928년 1월 7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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