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사천(泗川) 사람이다.
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던 그는 1919년 3월 최범술(崔凡述) 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강달영(姜達永) 등과 함께 경남 진주(晉州)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그는 1921년 진주청년회 의사(晋州靑年會議事), 1922년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진주지회(晋州支會) 임시의장, 1923년 천주교청년회 회장, 진주각단체연합회 위원, 1924년 동우회(同友會) 임원, 1927년 신간회(新幹會) 진주지회 간사 등을 맡으며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 조우제는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암살단은 1925년 9월 경,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던 1927년 10월 경 그는 장진홍이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 大邱支店) 등지를 폭발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날 오전 11시 50분 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매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하는 한편 조사를 비밀리에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우제는 폭탄을 투척한 활동에 연루, 붙잡혀 1년 4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된 뒤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여, 1931년 4월에는 진주농민조합(晉州農民組合) 조직선전부(組織宣傳部) 위원, 진주 소비조합 취지 및 정관 기초위원(定款起草委員)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33년 전북교원(全北敎員) 비밀결사 활동에 연루되어 다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7개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4년 4월 21일 전주 검사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3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65面
- 慶南日報(1911. 6. 14)
- 朝鮮日報(1924. 10. 26, 1929. 12. 28, 12. 29, 12. 30)
- 中外日報(1927. 12. 8)
- 每日申報(1929. 12. 29, 12. 30)
- 東亞日報(1921. 4. 15, 1922. 3. 1, 9. 11, 10. 25, 11. 2, 11. 15, 1923. 3. 28, 5. 10, 6. 18, 6. 20, 6. 29, 1926. 6. 14, 1927. 10. 23, 12. 8, 1929.12. 28, 12. 29, 12. 30, 1930. 11. 13∼16, 1931. 4. 10, 7. 7, 1933. 9. 16)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刑事事件簿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9卷 292面
- 騎驢隨筆(宋相燾) 392面
- 3·1運動實錄(李龍洛, 1969) 682面
- 釜山·慶南 3·1運動史(3·1同志會, 1979) 499面
- 韓國靑年運動史(鮮于基聖, 1973) 394面
- 형평운동연구(김중섭, 1994) 122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