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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725
성명
한자 金鴻南
이명 金鶴南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27년 5월 1928년 6월의 동맹휴학(同盟休學)참가(參加)

1929년 11월 광주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 광주고보(光州高普) 주동자(主動者)의 1(人)으로서 시위(示威)전개(展開)하다가 체포(逮捕)되어 6刖(刑)

을 받음(판결등본)

1930년 독서회사건(讀書會事件)으로 징역 2년 6刖(刑)을 받음(판결등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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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 1929년 6월에 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회합하고 항일학생결사인 광주고보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확대 개편된 '독서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동회의 운영은 전회원을 5개조로 나누어 각각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민족정신을 함양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보생 가두시위에 참가 활약하였다.

제1차 시위후 그는 동월 10일 제2차 시위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박기석(朴己錫) 집에서 오쾌일(吳快一)·이신형(李信珩)·조길룡(曺吉龍) 등과 함께 모여 그에 따른 준비를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11일에 그는 오쾌일·조길룡 등과 함께 거사당일에 필요한 격문을 인쇄하였다.

거사 당일인 12일에는 전날 인쇄한 격문을 교내에 살포하고, 김삼석(金三錫)·송만수(宋萬洙) 등과 함께 광주고보생 가두시위 대열의 앞장에 서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광주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였으며,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0·247·251·264·929·1512∼1524·1633∼1654·1667∼1708면
  • 판결문(1930. 2. 26 광주지방법원)
  • 판결문(1930. 10. 18 광주지방법원)
  • 판결문(1931. 6. 13 대구복심법원)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17·720면
  • 판결문(1930. 5. 15 대구복심법원)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홍남 김학남(金鶴南) 전라남도 완도(莞島) 광주학생운동
본문
1911년 4월 22일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청산면(靑山面) 당락리(堂洛里)에서 출생하였다. 김학남(金鶴南)이라는 이명을 썼다. 1929년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2학년으로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광주학생운동은 독서회 활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취된 한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의 차별에 반발하면서 일어난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1929년 6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광주지역 학생들과 회합을 가지고 “조직적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 연구와 실행”을 위한 ‘독서회 중앙본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학교에 하부 조직으로 독서회 결성이 진행되었다. 1929년 6월 중순 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21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회합을 한 후 광주고보 독서회 결성에 참여하였다.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 한인 학생 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광주중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 간의 대규모 난투극이 벌어졌다. 양교 학생들은 무기까지 휴대하여 싸움에 참여하였다. 교사와 경찰, 소방대까지 출동해 양교 학생들을 해산시켰다.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독서회 회원들의 주도로 무장시위를 추진했고, 광주여고보·농업학교·사범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연합 가두시위로 발전하였다. 11월 3일 시위 이후 광주 지역 중등학교들은 모두 임시휴업에 들어갔다. 일제 경찰은 사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를 실시해 11월 12일까지 72명의 한국인 학생을 붙잡아 그 중 62명을 검사국에 송치하였다.광주 지역 학교의 독서회 중심 인물들은 전남청년연맹과 협의하여 2차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때 장재성으로부터 격문 인쇄를 의뢰받은 오쾌일(吳快一)과 합력하여, 11월 11일 밤 박기석(朴紀錫)의 집에서 1,000매의 격문을 인쇄하였다. 11월 12일 시위에서 인쇄된 격문을 교내에 살포하고, 가두 시위의 선두에서 지휘를 담당하여 시위를 앞장서서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광주고보에서 퇴학당하였다.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 1심과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의 항소심에서 이른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또한 독서회 활동과 관련해서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3월(미결구류 통산 70일)을 받았고, 1931년 6월 13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213일 통산)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6월 대구복심법원 1930-05-1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광주지법 공판에 부침 광주지방법원 1930-07-17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6월 미결구류일수 70일 본형에 산입 광주지방법원형사부 1930-10-18 국가기록원
4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1년 대구복심법원 1931-06-1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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