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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622
성명
한자 金榮宓
이명 廣金榮宓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4년 2월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 학생(學生)으로 징역 2년 6월의 언도(言渡)를 받고 복역(服役) (中) 해방(解放)으로 출옥(出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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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1년 1월에 동교생 임 굉(林宏)·이태길(李泰吉)·최낙철(崔洛哲) 등과 함께 당시 대구 동운동(東雲洞) 소재 이무영(李茂榮)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한 단체로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온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따라서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했으며, 회의 운영을 위해 비밀엄수·매월 10일 연구발표와 하급생지도 및 동지포섭 등의 방침을 정하였다.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이때 그는 이과부 책임 겸 사무원의 일을 맡았다. 동회는 1941년 2월부터 동년 3월까지 여섯차례의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졸업기를 당하여 회원들이 졸업을 하게 됨에 따라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같은 현지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우송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기로 했다. 그는 1941년 3월에 동교 졸업 후 충남 예산군 소재 신암공립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예심종결결정(1943. 2. 8 대전지방법원)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9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107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01·802·80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복 호: 월담(月潭) 경상남도 밀양(密陽) 대구사범학교 비밀 결사
본문
1920년 8월 2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낙동강 철교의 복선공사에 강제 노력 봉사로 동원되어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로 인해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학생 7명이 퇴학당하고, 11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게 되었다. 이 ‘왜관 사건’으로 일제의 패망과 독립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조직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1941년 1월 하순 대구사범학교 강두안과 함께 동급생인 안진강(安津江)·최락철(崔洛哲)이무영(李茂榮)·장세파(張世播) 등과 당시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독립이 실현될 것을 전망하고, 독립에 대비해 각자가 선호하는 학문 분야에서 연구에 매진하여 자기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을 기약하는 결의를 맺었다. 이를 위해 표면적으로는 학술 연구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실력 양성을 기반으로 삼아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 연구회(硏究會)를 결성하였다. 연구회는 비밀 엄수, 매월 1일 각자 분담 부문 연구 결과 발표, 각 부문 책임자는 회원 확보와 하급생 교육에 노력할 것 등을 활동 방침으로 설정하였다. 연구회는 대구사범학교의 교과목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을 구성하면서, 구성원들의 장점과 관심에 따라 부서를 편성하였다. 이에 문학부·역사부·공업부·정치경제부·이과부·교육부·지리부·수학부·농업부·종교부·전기과학부·문예부·물리부·음악부 등 모두 14부를 두고 회원의 학문 함양에 매진하였다. 이때 연구회에서 이과부 책임 겸 사무원을 맡았다.졸업 후에 각각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현지에서의 활동 상황과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고, 사무원은 다시 각지에서 보고된 상황을 취합하여 전체 회원에게 배부하게 되어 있었다.1941년 3월 졸업 후 충남 예산군 신암공립국민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같은 해 7월 대구사범학교 8기생으로 충남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갖고 있던 『반딧불』이 일제 관헌에게 입수되면서 대구사범학교 비밀 결사의 전모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대구사범학교 관련자 300여 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1년 8월부터 2년 3월의 예심 기간을 거쳐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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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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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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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대구광역시 달서구
2 사적지 대구학생 운동지 대구광역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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