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1910년이래 그는 항일운동을 위해 평북(平北) 의주, 창성, 개천 등지에 사립학교를 설치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제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3 1독립운동 이후 매부 최창식과 함께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건강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만 전력하였다. 그후 상해 임정에서 파견된 조한옥(趙漢鈺)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의 모집 권유에 따라 자금 모집에 활약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임정파견원 고일정(高一政)으로부터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지방행정기관 설치 및 군자금 모집의 부탁을 받고 이에 필요한 문서 등을 교부 받은 후 동지들을 규합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편 1920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통제적으로 지휘하고 수렴하기 위하여 연통제와 교통국제도를 활용하게 되자 그는 이에 적극 가담 활동하였는데, 이때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으로부터 12도 선정사(宣政使)로 임명받고 지하조직을 보다 더 강화하였다. 그는 인적자원의 확보와 군자금 모집, 정보의 제공, 국내 동포의 임정 인식 등 임시정부가 할 선정(宣政)의 일을 충실히 전달, 터득시켰다.
1921년 동지들에게 임시정부의 8가지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뜻에 부합될 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동년 3월에는 이중혁에게서 임정공채 액면가 12,200원을 교부 받고 활동하였으며, 5월 24일 자택에서 어대선 이중혁 등과 군자금 모금을 협의하다가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1922년 9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2. 3. 30 경성지방법원)
- 판결문(1922. 9. 25 경성복심법원)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5면
- 동아일보(1921. 6. 4, 12. 20, 1922. 1. 24, 3. 15, 3. 19, 3. 31,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