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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1975
성명
한자 韓偉健
이명 李鐵岳, 光宇, 李永植, 李光宇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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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2005 훈격 독립장
1919년 1월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의 대표로 3·1운동(運動)을 주도한 후 4월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내무위원(內務委員),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함경도의원(咸鏡道議員)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귀국한 직후 도일(渡日)하여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에서 유학한 후 1923년 조선인유학생(朝鮮人留學生) 학우회(學友會)의 일원으로 국내(國內) 순회강연(巡廻講演)을 벌였고 192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재직하면서 1924년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고, 1926년 11월 정우회선언(政友會宣言)을 발표한 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창립발기인(創立發起人)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중앙위원(中央委員)으로 활동하다 검거를 피해 중국(中國)으로 망명하여 1929년 이후 당 재건과 항일 투쟁(抗日鬪爭)의 일환으로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 학생공산당(學生共産黨),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 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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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서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1919년 1월부터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로 구성된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이때 그는 경성의학전문 대표로 참가했다. 또한 그는 만세운동을 위해 종교단측과 연합전선 형성을 위한 모임에 학생대표로 참석하면서 만세시위에 앞장서 나갔다.

3·1운동 후 일제의 체포망을 피한 그는 서울에서 생겨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상하이[上海]에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내무위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과 여운형(呂運亨)의 일본 방문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면서, 신채호(申采浩)가 상해에서 발간하던 주간신문『신대한(新大韓)』발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0년 잠시 귀국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당시인 1923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에 참가하여 위원·총무 등을 맡았으며 국내 순회강연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4년 1월 이광수(李光洙)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재동경조선인대회 명의로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귀국한 뒤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 등 사회단체에 가입하면서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공감해 오던 사회주의 사상의 실천을 위해 1926년 11월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여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2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新幹會) 발기에 참가하여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잡지『계급투쟁』을 발간하면서 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이철부(李鐵夫)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학생공산당(學生共産黨)·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한때 중국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중국공산당 허베이성[河北省] 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노선상의 차이로 중국공산당과 잠깐동안 단절한 뒤에도 1935년 12월 천진에서 항일집회 및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6년 봄 중공 북방국(北方局) 서기 유소기(劉少奇)에 의해 하북성위 서기 겸 텐진[天津]시위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1937년 5월 연안에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대회가 열릴 때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대회가 끝난 후 옌안[延安]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4권 426∼427·455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5권 743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8권 391면
  • 中外日報(1927. 11. 7, 1931. 12. 10)
  • 國外容疑朝鮮人名簿(警務局, 1934) 20면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47면
  • 朝鮮中央日報(1935. 3. 13)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제12권 1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95∼197면, 제9권 172∼173·184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 외, 1996) 525∼527면
  • 新幹會 發起人會에 關한 件(京鍾警高秘 第1812號, 1927. 2. 1), 思想問題에 關한 調査書類(2)
  • 朝鮮民族運動年鑑(上海總領事館, 1919) 7∼9면
  • 일제하사회주의운동사(한국역사연구회, 1991) 65∼66면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1986) 제3권 197∼198·249∼267면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1983) 제3권 159∼160면
  • 東亞日報(1921. 6. 30, 1923. 7. 12·19·24, 1925. 11. 30, 1931. 10. 6)
  • 秘密結社 學生共産黨 組織 計劃의 件(京龍高秘 第4848號, 1930. 9. 12), 思想에 關한 情報綴 10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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