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의 구포(龜浦)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구포면 면서기인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平壤)의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계획되었다.
3월 27·28일에 걸쳐 이곳 청년들인 김옥겸(金玉兼)·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유기호(柳基護)·윤 경(尹涇)·김윤길(金潤吉)·허 정(許楨)·김용이(金用伊)·최종호(崔鍾浩)·유진영(兪鎭榮)·윤대근(尹大根)·임봉래 등은 박영초·이수련의 집에서 몇차례의 회의를 통하여, 구포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독립기 등을 제작하였다.
3월 29일 정오, 그는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구포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김옥겸등 11명의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격분한 그는 오후 3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하여 맨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병력이 증원된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후 그는 일제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3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이듬해 1월 19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예심종결결정문(1919. 7. 16 부산지방법원)
- 사망확인서(구포면장)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92·1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