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18년 일본 수상 계태랑(桂太郞) 주살모의에 관련되어 1년간 거주 제한 처분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 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중국인 학생들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하였다. 동년 9월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의주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임시정부 대표의 여비를 조달하였다.
1920년 6월에는 임시정부 법무차장 안병찬(安秉瓚)이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자, 그는 당시 외무총장이던 안창호(安昌浩)와 재무국장 고일청(高一淸)으로부터 외교교섭의 명을 받고 안병찬의 석방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 3일에는 상해에서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에 가입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동년 4월 4일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남경교회에서 일을 보다가 1922년 4월 하얼빈(哈爾賓)으로 왔다. 이곳에서 동년 8월 14일 평남 안주(安州)교회 목사의 직을 맡아 입국 도중 신의주 급행열차 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동년 10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 봉천(奉天)으로 건너 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 1931년 8월에는 평양 대동강에서 개최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하계대회에 참석하여 이에 가입하고, 1937년 5월까지 동우회 선천지회(宣川支會) 간사로서 민족계몽과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또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으나,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무죄로 석방될 때까지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84·1285·1313·1347·1362·136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01·82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6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39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39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8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45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6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3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28면
- 동아일보(1922.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