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21년 국내에서 독립단 결성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평소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1921년 1월 중국으로 망명, 북경에서 박용만(朴容萬), 이회영(李會榮) 등이 주도 조직한 독립단에 가입하고 경리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태평양회의가 미국 워싱톤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전민족이 내외상응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게 되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독립을 공인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국내 각지에 독립단을 결성할 목적으로 동년 8월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9월 평소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 하던 황정연(黃正淵), 이춘구(李春求) 등과 모임을 갖고 군사령부를 조직할 계획임을 알렸다. 이에 황정연을 경리부 부장, 이춘구를 참모장으로 하는 군사령부를 조직키로 하고 이후 사단 설치를 위한 모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그가 일경의 밀정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1928년 1월 각지역 대표의원 46명이 모여 재만동포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개최한 만주조선인대회(滿洲朝鮮人大會)에 재만동포퇴거문제대책안동현강구회(在滿同胞退去問題對策安東縣講究會)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 대회에서 결의된 상설기구 만주조선인대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만동포들의 생활안정과 권익보호에 힘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21. 12. 14. 京城地方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697·701面
- 친일파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제2권 99面
- 反民者大公判記(金永鎭編, 漠豊出版社, 1949) 곽상훈 검찰관의 기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