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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6610
성명
한자 金熙重
이명 金凞重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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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0 훈격 애족장
1921. 9월 서울에서 이춘구(李春求) 등과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동년 10월 말 경 친일경관 김태석(金泰錫)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1928년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열린 재만조선인대회(在滿朝鮮人大會)위원(委員)으로 참여하여 재만(在滿) 조선인(朝鮮人)의 생활편의를 위해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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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21년 국내에서 독립단 결성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평소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1921년 1월 중국으로 망명, 북경에서 박용만(朴容萬), 이회영(李會榮) 등이 주도 조직한 독립단에 가입하고 경리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태평양회의가 미국 워싱톤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전민족이 내외상응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게 되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독립을 공인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국내 각지에 독립단을 결성할 목적으로 동년 8월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9월 평소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 하던 황정연(黃正淵), 이춘구(李春求) 등과 모임을 갖고 군사령부를 조직할 계획임을 알렸다. 이에 황정연을 경리부 부장, 이춘구를 참모장으로 하는 군사령부를 조직키로 하고 이후 사단 설치를 위한 모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그가 일경의 밀정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1928년 1월 각지역 대표의원 46명이 모여 재만동포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개최한 만주조선인대회(滿洲朝鮮人大會)에 재만동포퇴거문제대책안동현강구회(在滿同胞退去問題對策安東縣講究會)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 대회에서 결의된 상설기구 만주조선인대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만동포들의 생활안정과 권익보호에 힘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21. 12. 14. 京城地方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697·701面
  • 친일파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제2권 99面
  • 反民者大公判記(金永鎭編, 漠豊出版社, 1949) 곽상훈 검찰관의 기소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희중 김희중(金凞重) 경상북도 문경 제2보합단 국내 지단 사건
본문
1894년 6월 6일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 송암리(松岩里) 경암(景岩) 마을에서 김영호(金榮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김희중(金凞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부 성균진사(成均進士) 김두철(金斗哲)은 1894년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進士)로 급제하여 1896년 서상렬(徐相烈) 의병부대에 참여한 바 있으며, 1908년 용궁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부 김두철이 한두리[(大道村)]의 장수황씨 문중과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한두리의 도천학교(道川學校)에서 신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또 여동생 김용이(金龍伊)도 한두리 장수황씨 문중의 황석연(黃石淵)과 혼인하였으므로 장수황씨 문중과 더욱 교분이 깊었다.1912년부터 1916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측지과(測地課) 기수(技手)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18년 결혼과 동시에 경북 문경군(聞慶郡) 산북면(山北面) 대상리(大上里), 속칭 한두리로 이주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만주와 상하이(上海)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朴容萬)과 이회영(李會榮)이 주도하는 제2보합단(第二保合團)에 가입하여 경리부장(經理部長)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제2보합단은 독립군을 통괄하는 대조선국민군(大朝鮮國民軍)을 조직하여 군정부의 역할을 목표로 국내 각처에 요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전 민족이 내외 상응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게 되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고 독립을 공인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1921년 8월 국내 각지에 독립단(獨立團)을 결성할 목적으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평소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 하던 황정연(黃正淵)·이춘구(李春求) 등과 함께 서울 판동에 있는 신장희(申章熙)의 집에서 회합하였다. 이때 입국 목적이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기 위해 국내에 조선 독립군 사령부(朝鮮獨立軍司令部)를 조직할 계획임을 알렸다. 그리고 황정연을 경리부 부장, 이춘구를 참모장으로 하는 군사령부(軍司令部)를 조직하기로 하고 이후 사단(師團) 설치를 위한 준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921년 10월 말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풀려난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28년 1월 각 지역 대표 의원 46명이 모여 재만 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개최한 만주조선인대회(滿洲朝鮮人大會)에서 재만동포퇴거문제대책안동현강구회(在滿同胞退去問題對策安東縣講究會)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결의된 상설 기구 만주조선인대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만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권익 보호에 힘쓰기도 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3년 경성지방법원 1921-12-1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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