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안성(安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元谷面)·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과 사전에 계획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4월 1일 오후 8시경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던 원곡면 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만세시위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들고 일본인 면장을 선두로 끌어내어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향하였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을 경계짓는 고개에 이르자, 그는 선두에 나아가 오눌 저녁에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하늘의 도움이니 양성 경찰주재소로 가서 일본인 순사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날 밤 9시 30분경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이유석 등이 지휘하는 원곡면민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오후 10시경 재차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 때 그는 선두에 서서 주재소에 투석하고 방화하였으며 양성 우편소와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 고리대금업을 하던 일본인 융수지(隆秀知)의 집, 양성면 사무소를 계속 습격하여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검거대상이 되었으나, 이유로(李裕魯)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계속 피신생활을 함으로써 옥고를 치르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75∼1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