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기도 적성(積城)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마저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한국군에서 정교를 지낸 정용대는 군대해산 이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스스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을 칭하고 무장한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적과 접전하면서 적성·양주(楊州)·풍덕(豊德)·교하(交河)·통진(通津)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편 인근 일대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의병 운동의 효과적인 전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은찬(李殷贊) 의진과의 연합 전략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1908년 2월 27일 이은찬 의진과 함께 양주군 석적면(石積面)에서, 그리고 3월 2일 회암면(檜巖面)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그러나 이은찬이 의병운동의 확대를 모색하기 위하여 상경하던 길에 용산역에서 일본 경찰관에게 체포된 후 다소 전세가 약화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인순(尹仁淳) 의진과의 연합 전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6월 8일 부평(富平)군 내면을 습격하였으나 주재 순사 3명 및 수비대 13명의 공격을 받아 의병 4명이 생포되었고 무기 9정을 빼앗기고 패퇴하였다. 이때 정용대 의진의 타격은 상당히 커서 일군은 이들이 당분간 재거(再擧)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정용대 의진은 적과 적극적인 교전 이외에도 군자금 조달을 풍족히 하여 보다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모색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1908년 4월 23일 부하 이종근(李宗根)외 18명으로 하여금 통진군 대패면(大佩面)의 심진사(沈進士) 집에 가서 동면 27동 동장과 양릉면 28동 동장과 산빈면(山빈面) 24동 동장을 일제히 불러서 총을 사올 비용을 염출해 줄 것을 요청하여 5일 후에 대금 1만 5천냥을 거두어 거사 자금에 보태었다. 그리고 4월 24일 대패면에 거주하는 부위 김순좌(金順佐)에게서 군도 1자루, 양릉면 곡촌(谷村) 한(韓) 모에게서 군도 2자루, 교하군 민(閔)판서에게서 양총 7자루·탄환 9백 발 그리고 고을 사람에게서 군도 4자루를 거두어 전력을 보완하였으며 고을 사람 조운원(趙云遠) 등과 미리 기맥을 통하여 헌병·순사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케 하였다. 이상의 일련의 사건에 깊은 관계를 가진 이종근은 1908년 10월에 유형 5년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부하 신관수(申寬秀)는 4월 12일 통진군 수곡리(水谷里)의 김화안(金和安)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10원을 조달하였고, 5월 20일경 교하군 문발리(文發里)의 민영도(閔永道)의 집에 들어가 총기 2자루와 탄환 1백 발을 조달하였다. 1909년 3월 15일 신관수·박만안(朴萬安) 외 5명은 풍덕군 사동리(仕洞里) 이장 김연의(金演義)집에 들어가 50원을 모금하여 군자금으로 썼으며, 5월 12일경 풍덕군 남촌리(南村里) 이장 강신규(姜信奎)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불응하자 그의 창고를 불태워 창고 안의 벼 8섬을 소각하였다. 6월 9일경 경기도 강화군 고도(高島) 해안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한 활약을 하였으며, 연안읍내에 거주하는 최성섭(崔聖燮) 등에게 현미 1백 50부대를 받아 군량미로 썼다.
이상의 사건으로 인하여 신관수는 1908년 7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밖에 정용대는 백영현(白永賢)과 김현기(金顯基) 등에게도 군자금 조달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먼저 백영현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8년 12월 20일경 양주군 동면 강동(薑洞)을 거점으로 하고 백석면리(白石面里)에 거주하는 송범석(宋範錫) 집에 가서 군자금 6천원을, 그리고 광석면리(廣石面里)에 거주하는 이계운(李季雲)의 집에서 5천냥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1909년 6월초에 동지 30~40명과 함께 양주군 대지리(大池里) 변유삼(邊留三)에게 2차례에 걸쳐 3천 냥을 거두었다. 한편 김현기는 백영현과 함께 활약하기도 하면서 1909년 4월에 양주군 백석면 신지리(莘池里)에서 1천 1백 냥을 모금하였다. 이상의 일로 체포된 백영현과 김현기는 1909년 8월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밖에 이학선(李學善)은 1908년 2월부터 정용대의 부하로 활약한 것이 소위 내란죄에 해당한다 하여 유형 5년형을, 그리고 이치옥(李致玉)은 소위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모두 일제의 판결문에서 확인되는 사항이므로 이로 미루어 보아 정용대 의진의 활약상이 매우 두드러졌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정용대는 경기도 일대의 의병소탕전을 전개한 일본 토벌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1909년 10월 28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