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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14
성명
한자 金玉兼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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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구포(龜浦)시장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형을 받고 복역한 사실이 있고 출옥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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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김해(金海)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의 구포(龜浦)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구포면 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平壤)의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계획되었다. 그는 3월 27, 28일에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 등의 집에서 임봉래·유기호(柳基護)·윤 경(尹涇)·김윤길(金潤吉)·허 정(許楨)·김용이(金用伊)·최종호(崔鍾浩)·유진영(兪鎭榮)·윤대근(尹大根) 등과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교대로 밤을 새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소형 태극기 수백 매씩을 제작하였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그는 구포장터에서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그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192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신호(神戶)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검속되기도 하였으며, 이듬해에 귀국하여 2·8독립선언 대표중의 한 사람인 김철수(金喆壽)와 함께 양산(梁山)지방을 근거로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만주(滿洲)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는 등 계속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3·1운동실록(이용락) 613면
  • 수형인명부(부산지방검찰청 발행)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91·19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옥겸 - 경상남도 김해(金海) 동래군 구포면 만세시위
본문
1892년 3월 19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하동면(下東面, 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德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부산 구포(龜浦)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3월 20일 동래군 구포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구포면의 만세시위는 구포 출신으로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이던 양봉근(楊奉根)이 귀향해 구포면 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임봉래와 구포의 유지인 윤경(尹涇)·유기호(柳基護) 등으로부터 구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시위 준비에 동참하였다. 3월 27일과 28일 주민들과 함께 구포리 박영초(朴永初)·이수연(李守蓮)의 집에서 모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에 의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 수백 매를 제작하였다.3월 29일, 구포 시장에 모인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晋泰)·김장학(金章鶴) 등 청년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정오에 구포시장에 운집한 1,0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윤영태(尹永台) 면장에게 “조선인인데도 왜 시위운동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출동한 일본 군경에 붙잡혔다.오후 3시경 주도 인물의 체포 소식을 전해 들은 주민들은 구포주재소로 달려갔다. 1,200명이 넘는 시위 군중은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먹과 곤봉으로 구포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투석으로 대항하며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해산하였다.그 결과 1919년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3년 5월 고베(神戶)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검속 당하자 이듬해 귀국하였다. 2·8독립선언 대표 중 한 사람인 김철수(金喆壽)와 함께 양산(梁山) 지방을 근거로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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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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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구포장터 3.1운동만세 시위지 부산광역시 북구
2 비석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부산광역시 북구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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