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7월 서울 조선소년연합회 (朝鮮少年聯合會) 발기대회 (發起大會) 에서 창립 준비위원으로, 동년 10월 동연합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및 조사연구부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동년 12월 신간회 (新幹會) 목포지회 (木浦支會) 정기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었고1928년 8월 전남 (全南) 광주 (光州) 에서 개최된 전남소년연맹 (全南少年聯盟) 간담회 활동에 연루되어 체포된 바 있으며 동년 12월 고려공산청년회 (高麗共産靑年會) 에 가입하여 목포 (木浦) 야체이카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 (獄苦) 2년 7개월 (個月) 여 (餘)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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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조선일보사 목포지국(木浦支局) 기자로 근무하던 그는 1926년 목포무산청년회와 목포청년동맹 상무서기로 활동하면서 청년운동에 앞장 섰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장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의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소년운동에도 힘을 기울여 갔다. 소년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1927년 7월 서울에서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가 세워질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는 한편 중앙집행위원 및 조사연구부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시천교당에서 열린 조선소년연합회 발기대회는 4개 연합과 68개 소년단체 대의원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또한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목포지회 설립에도 힘을 쏟아 정기대회에서 간사로 활약하였다.
1928년 8월 전남 광주(光州)에서 개최된 전남소년연맹(全南少年聯盟) 간담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28년 12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목포야체이카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京城日報(1930. 12. 9)
- 每日申報(1930. 12. 10·12. 23)
- 新幹會硏究(李均永, 1993) 6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486면
- 東亞日報(1927. 8. 1·10. 19·12. 8, 1928. 8. 23, 1930. 12. 1∼3·5∼6·9·23)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12. 22)
- 朝鮮日報(1927. 12. 8, 1930. 11. 5·17∼20·22·27·30·12. 1∼7·15∼16·23)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8권 511·577면, 제9권 624면
- 現代史資料(姜德相, 1971) 제29권 10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605∼6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