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1929년 서울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3학년에 재학 중, 동년 11월 광주학생운동으로 다수의 한국 학생들이 일경에 붙잡히는 등 탄압을 받게 되자, 이것을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으로 규정하고, 각지의 학생들과 동맹휴교 및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30년 1월 16일 정윤희(鄭允熙)·박재열(朴在烈) 등과 협의하여 약 1백여 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두 부대로 나누어 '학원의 독립', '만세, 피압박민족' 등의 문구를 적은 기(旗)를 각각 선두에 들고 교문을 나서 종로와 파고다공원,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익선동(益善洞)을 지나 창덕궁을 거쳐 봉익동(鳳翼洞)으로 각각 만세시위 행진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달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이 확정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30. 1. 17, 2. 17, 2. 23, 7. 3)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282·1539·1540면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6집 229면
- 조선일보(1930.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