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함북 경원(慶源) 사람이다.
러시아 동부(東部) 시베리아의 우스문에서 출생한 그는 일찍이 만주 통화현 합니하(滿洲 通化縣 蛤泥河)에 있는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11월 김원봉(金元鳳)·윤치형(尹致衡)·황상규(黃尙奎) 등 13명과 함께 그는 13명과 만주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의 공격목표는 일차적으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그리고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사 및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 그리고 각지의 경찰서 등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무기였다. 따라서 그는 1920년 3월 김원봉 등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폭탄과 기타 무기를 구입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결국 그는 4월초, 중국인 은익삼(殷益三)에게 도화선용(導火線用) 폭탄 7개와 투척용(投擲用) 폭탄 6개, 그리고 미국제 권총과 탄약 100발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4월 하순경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구입한 무기들은 중국궤짝에 위장·포장하여 기선(汽船)을 타고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리고 안동 원보상회(元寶商會) 주인인 이병철(李炳喆)에게 비밀리에 갖고 온 물품들을 넘겨주어 앞서 부산(釜山)에 내려가 잠입하여 있던 의열단 동지 배중세(裵重世)에게 기차편으로 우송토록 하였다.
한편 그는 길림(吉林)으로 돌아와서 동지 곽재기(郭在驥)에게 그간의 일을 알리고 그와 함께 중국 안동현으로 가서 윤치형에게 여비 30원을 받은 후 1920년 5월 13일 황상규·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로 잠입하였다. 5월 19일 그는 미리 서울에 와있던 김기득(金奇得)과 상해(上海)에서 온 이낙준(李洛俊) 등과 더불어 서울 인사동(仁寺洞) 서상락(徐相洛)과 서대문의 정태준(鄭泰駿) 집을 오가며 거사방법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동지인 이일경(李一慶)·김재수(金在洙)·김병환(金鉼煥)·배중세 등에게 연락하여 부산 등지에 보내두었던 폭탄을 갖고 오게 하고 동지들과 거사대상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였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행동이 탐지되어 결국 일제 조선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 의해 1920년 6월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21년 3월 3일 예심(豫審)이 종결되었고 그는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아 청진형무소(淸津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파옥, 도주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2년형이 추가되어 다시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8년 3월에 출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97·98·102·197∼199면
- 기려수필 281∼283·300·30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4·215·361·36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1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087면
- 판결문(1921. 6. 21 경성지방법원)
- 무장독립운동비사 180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7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7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92∼94·160·161·163·164·66·167·169·393·394·660∼67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