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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557
성명
한자 金外得
이명 金外德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29년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이 일어나자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학생으로 활동하였다가 퇴학되어 귀향하여 양산(梁山) 농민조합(農民組合)에 가입하고 1932. 3월 양산농민조합 간부가 소작료 인하 시위를 하다 양산경찰서(梁山警察署)에 구속되자 이들을 석방시키기위하여 동서유치장을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1년6월형을 언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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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 서울의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시위운동을 폈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학교를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梁山農民組合)에 가입, 소년부원(少年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첫째, 소작권 영구확립, 둘째, 지세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부담, 셋째, 소작료 4할납부 등을 결의하였으나 일경은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간부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붙잡힌 조합간부들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최달수(崔達守)·김태근(金泰根) 등 3백여명의 조합원들을 주도하여 동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조합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가 순국하였다. 일단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은 다시 붙잡힌 조합간부들을 호송하는 도중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급습을 받아 그를 비롯한 170여명의 조합원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32. 3. 20)
  • 수형인명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외득 김외덕(金外德) 경상남도 양산(梁山) 양산농민조합 정기대회 사건
본문
1912년 (음)8월 20일 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석산리(石山里)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라 김외덕(金外德)이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1929년 서울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호응하여 일어난 1930년 3월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퇴학당하고 양산으로 귀향하였다.1931년 4월 4일 이귀운(李貴云)의 주도로 조직된 양산농민조합(梁山農民組合)에 가입하여, 소년부에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열린 제3회 정기대회에서 첫째 소작권 영구 확립, 둘째 지세 및 기타 공과금의 지주 부담, 셋째 소작료 4할 납부 등을 결의하였던 바, 일제 경찰이 이를 문제 삼아 3월 5일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간부들을 체포하여 구류 처분하였다.이에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이들을 구출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32년 3월 16일 9시경 300여 명의 조합원이 남부동(南部洞)의 오성철(吳性哲), 북부동(北部洞)의 진경오(陳敬五), 중부동(中部洞)의 이임수(李任守) 집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다.이후 김장호와 함께 조합원들을 이끌고 양산경찰서(梁山警察署)를 포위한 다음, 구류되어 있는 조합원의 가족인 문수동(文守東), 최숙이(崔淑伊), 이복득(李福得) 등을 앞세워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였다. 양산경찰서 측이 석방 요구를 무시하자, 조합원들을 이끌고 양산경찰서 내부 진입을 시도하였고, 일제 경찰들이 이를 저지하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이때 선두에 서서 일제 경찰이 쏘는 ‘공포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합원들을 독려하면서 시위를 이끌었다. 조합원들의 기세에 압도당한 양산경찰서장은 실탄 발사를 명령하였고, 조합원 윤복이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시위대도 해산되었다.피신 도중에 구류 중인 양산농민조합 간부들을 부산(釜山)으로 이송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양산농민조합 소년부원 50여 명과 습격단을 조직하여 이들을 구출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3월 17일 새벽 3시, 이들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으나, 경상남도 경찰부·부산경찰서·동래경찰서로부터 병력이 증파되어 70여 명에 달하는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소년부원들이 선두에 서서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이후 양산을 떠나 김해(金海)·부산 등지로 피신하던 중, 1932년 4월 7일 경부선 물금역(勿禁驛)에서 붙잡혔다.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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