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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383
성명
한자 權容斗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29. 4월 대전중학교(大田中學校) 3학년(學年) 조선입학생단(朝鮮入學生團)선우회(鮮友會)가입(加入)하여 일인 학생 구타(日人學生毆打)(因)하여 징계(懲戒)를 받고, 1931년 비밀 결사(秘密結社)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가입(加入)하고 폭정 규탄(暴政糾彈)농민야학(農民夜學)으로 인재(人材)양성(養成)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 3년간(年間) 집행유예(執行猶豫)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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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충남 대덕(大德) 사람이다. 1926년 6월 대전(大田) 제일보통학교(第一普通學校) 6학년 재학시 6·10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무기정학을 당하였고 1929년 4월 대전중학교(大田中學校) 3학년 때 한국인 학생조직 선우회(鮮友會)에 가입하여 일본인 하급생인 멸시태도를 제재하려고 구타하여 징계를 당하였다. 1931년 1월 대전중학교 재학시 비밀결사인 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에 가입하여 일제식민통치를 규탄하고 농민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정신 고취 및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던 중 1932년 12월 8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또한 1942년 10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일제의 멸망과 조국광복을 위한 기도제(祈禱祭)를 수차에 걸쳐 거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大田公立中學校 退學者明簿
  • 東亞日報(1932. 11. 10, 1934. 4. 1)
  •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 大田中學校 學籍簿
  • 大田公立中學校 生徒明細簿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용두 호 : 남곡(南谷) 충청남도 대덕(大德) 6.10만세운동, 충남전위동맹 사건
본문
1914년 6월 15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山內面) 무추리(無愁里)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과 가정 배경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파악할 수 없다. 1926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대전제일공립보통학교(大全第一公立普通學校) 6학년생으로 재학하던 중 6·10만세운동이 발생하자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학교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중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1929년 4월 대전중학교(大田中學校) 3학년 재학 중 한국인으로 구성된 학생 조직인 선우회(鮮友會)에 가입하였다. 일본인 하급생이 한국인 학생에 대해서 멸시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격분하고 구타하여 징계를 받기도 하였다. 1932년 5월 21일 대전중학교 재학생으로 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 산하 기관인 적색소년동맹(赤色少年同盟) 조직에 참여하였다. 충남전위동맹은 1932년 5월 1일 정창세(鄭昌世)·원종응(元鍾應) 등이 중심이 되어 충남 대전군(大田郡) 외남면(外南面)에서 조직한 사회주의 운동 단체였다. 충남전위동맹의 결성은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영향에 따른 것이었다. 충남전위동맹 지도자들은 학생·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사상 전파를 목적으로 하부 기관을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정창세로부터 학생 단체 조직을 권유받아 김지성(金知成)·이삼봉(李三奉) 등과 함께 적색소년동맹을 조직하였다. 적색소년동맹은 총책·교양부·재정부로 구성되었다. 이중 교양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적색소년동맹 단원들은 매월 첫째, 셋째 월요일에 모임을 하고 무산자 이익 옹호를 위해 활동하기로 결의하였다. 충남전위동맹과 적색소년동맹에서 활동을 전개하던 중 6월 19일 조직이 해체되었다. 이는 전북 일대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한종식(韓宗植)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기존 지도부들은 조직을 완전히 해체하기보다 직업별로 세포조직을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대전중학교 학생 서재윤(徐載潤)·오명근(吳命根) 등과 협의하여 교내에 학생반을 조직하는 데 일조하였다. 학생반은 매월 2회 모여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발표·토론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학생반은 책임·교양부·재정부로 구성되었고, 총책임자를 맡아 학생반을 이끌었다. 1932년 6월 정창세와 함께 무추리 농민 권용성(權容聲)·권용기(權容綺) 등을 대상으로 사유재산제도 철폐와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필요성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필요한 전술을 연구하고자 독서회를 조직하였으며, 교양부를 맡아 독서회를 이끌어 갔다. 9월 20일경 서재윤 등과 함께 원병식(元秉植)의 집을 학생반의 도서실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매달 10·20·30일에 만나 사회과학에 관한 서적을 읽고 토론하기로 하였다. 도서실을 만든 것은 충남전위동맹의 지도자였던 원종응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11월 6일 밤 원종인·서재윤 등과 함께 원병식의 집에서 러시아혁명 기념회를 열었다. 여기서 한국도 신속히 공산혁명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8일 원종응 등과 함께 대전 군시제사(郡是製絲)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고취할 목적으로 격문을 제작하여 노동자들에게 전달하였다. 12일에는 무수리 천변에서 독서회 모임을 하였다. 이 회합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군시 제사 여공 파업 사례를 들면서 무산대중의 이익을 위해 분투하자고 주장하였다. 대전 일대의 학생·노동운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32년 봄부터 1933년 3월까지 전북 지역 경찰들은 ‘전북적색비사(全北赤色秘社) 사건’, ‘충남전위동맹 사건’ 관련자 2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결국 1932년 12월 8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 출판법위반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집행유예 3년 전주지방법원형사부 1934-03-3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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