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이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양주에서 의거하였다. 처음에는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여 의병장으로서 양주 석치(石峙)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그후 파주·적성·포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말에 경기 의진이 연합하여 점차 13도연합의진으로 확대되어 이인영(李麟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울 진격을 계획하였으나 30리 지점까지 접근하였다가 좌절하였다.
그후 허 위(許蔿)를 대장으로 임진강 일대에서 잔류 의병들을 규합하여 세력 확대를 꾀할 때 윤인순 의진은 허 위 의진에 합류하여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보다 세력확대를 위하여 국내·외의 세력규합을 모색하던 중 허 위가 1908년 6월에 체포되고 10월에 적의 해침을 당하게 되자 다른 의진과 같이 소규모의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추세로 전환하여 윤인순 역시 30∼40명 단위로 하여 파주·적성·양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1909년에는 이은찬(李殷瓚)·정용대(鄭用大)·강기동(姜基東)·연기우(延基羽) 등과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양주·파주·포천·영평·연천·삭령·금천·배천·연안을 연결하는 육상과 해상·도서지방 등에서 활약하였다. 이렇게 항전을 계속하던 중 1909년 3월 17일 양주(楊州) 북방 4리에서 삭령 수비대(朔寧守備隊)와 전투 중 부하 16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 순국하였다.
그의 부하로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형 집행을 받은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는 점으로 보아 윤인순 의진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23세이었던 송창근(宋昌根)은 1907년 12월에 양주의 한승교(韓承敎)에게 군자금 20원을 거둔 혐의로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25세이었던 서춘만(徐春萬)과 35세의 윤치대(尹致大)는 1908년 11월 9일 고양군의 이치안(李致安)과 정흥택(鄭興澤)의 집에서 의병용 쌀을 거두고자 한 혐의로 각기 유형 5년형을 선고받았다. 29세의 김경록(金京錄)과 김해룡(金海龍)은 1908년 10월에 일진회원 처형에 참여한 혐의로 각기 유형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7세의 김영현(金永賢)·21세인 김현기(金顯基)는 1908년 12월에서 1909년 6월까지 양주 일대에서 다액의 군자금을 거둔 혐의로 각기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무기 조달·운반을 담당하던 질그릇 행상 김삼석(金三石)은 금고 2개월의 형을 받기도 하였다. 20세의 어봉선(魚鳳善)은 1909년 2월에 포천군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수용 물품을 거둔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홍준성(洪俊成)은 1909년 1월에 적성(積城)·양주(楊州)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활동은 이강산의 지휘하에서 혹은 정용대(鄭用大) 의진 소속 부대원들과 합동작전에 의하여 수행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18·21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55·56·91·112·154·162·166면
- 매천야록 491면
- 의암집(유부)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32·750·75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11·5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