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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127
성명
한자 金永伯
이명 金永白, 金佑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8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4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7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늑결(勒結)됨에 국권 회복(國權恢復) 도모(圖謀)하여 전남(全南) 장성군(長城郡)에서 거의(擧義)하고 1,000여명(余名)규합(糾合)하여 전남(全南), 전북(全北) 등지(等地)에서 활동(活動)하고 1908년에는 흥덕(興德) 방문산(方文山)에서 일군(日軍) 다수(多數)살해(殺害)하고 1909년에는 흥덕(興德), 일남(一南), 유점리(鍮店里)에서 일군(日軍)치열(熾烈)교전(交戰)으로 많은 전과(戰果)를 올리며 활동(活動)하다 일군(日軍)에 체포되어 1909. 12. 20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내란죄(內亂罪)(絞)(處)하여진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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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영백은 전남 장성(長城) 북이면(北二面) 달성리(達城里) 사람이다.

정미조약(丁未條約)이 체결되고 이어서 군대마저 해산되어 일제의 식민지화 추진이 노골화 되어가자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7년 10월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동지 약 1천 명을 규합하여 부하를 삼고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 동지 중에는 박화옥(朴化玉)이 있었다.

선봉·중군·후군장·좌우익장·군량관 등의 부서를 두고 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총 2백정을 준비하였다.한편으로 자금·탄약·식량·피복 등을 군민들로부터 징발하여 군비를 갖추었다. 그 후 장성을 중심으로 하여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 및 순창의 각 고을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1908년 음력 3월 4일 정읍 단곡리(丹谷里)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공격하였다.7월에는 흥덕군 소속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방장산(方丈山) 산록 백계동(白溪洞)에서 수비대의 기병과 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동군 오현(鷔峴)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

1909년 1월 말경 동군 북이면 상곡리(上谷里)에서 수비대 기병과 그리고 2월 중순에는 동군 북일면(北一面 東山里), 2월말에는 흥덕군 세곡리(細谷里), 4월 11일에는 동군 일동면 구수교(一東面 九水橋),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江古里),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 유점리(一南面 鍮店里)에서 각각 일헌병과 전투하고 상호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2월 적에게 노출되어 하는 수 없이 일헌병대 고부 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 재판에서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몇 차례의 항소 끝에 마침내 교수형이 확정되어 1910년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할만 하였지만, 진중일기류(陣中日記類)를 남기지 못하여 일본측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음이 유감이다. 또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인지 양반 출신인 해산 전수용(海山 全垂鏞)과는 가까운 지역에서 활약하였으면서도 연합전선을 전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에 의하면 해산이 그를 다소 무시하려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항일민족전선의 약체화 내지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4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485·486·4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15·816·8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2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백 - 전라남도 장성(長城) -
본문
1880년 9월 3일 전남 장성군(長城郡) 북이면(北二面) 달성리(達城里)에서 태어났다.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그 해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고향에서 동지 박화옥(朴化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스스로 대장이 된 뒤 부대를 편성하였다. 총 200정을 준비하고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정읍·부안·흥덕·고창의 각 고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정읍 단곡리(丹谷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 공격하였고, 7월에는 흥덕군 소속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방장산(方丈山) 산록 백계동(白溪洞)에서 수비대의 기병과 헌병,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전투하였고, 11월 상순에는 장성군 오현(鰲峴)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1909년 1월 말경 북이면 상곡리(上谷里)에서 수비대 기병과, 2월 중순에는 북일면(北一面) 동산리(東山里)에서, 2월 말에는 흥덕군 세곡리(細谷里), 4월 11일에는 같은 군 일동면(一東面) 구수교(九水橋),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江古里),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一南面) 유점리(鍮店里)에서 각각 일본 헌병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4월 18일 김영백 의병부대 70여 명이 광주헌병대 장성분파소에서 파견한 일본군 하사 1명, 병사 3명, 헌병보조원 9명으로 구성된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의병 9명이 사망하고 탄약과 잡품 다수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24일에는 소속 의병 약 29명이 장성군 북상면 새재에서 약수정(藥水亭)파견소 헌병 2명, 보조원 4명과 교전하여 의병 1명이 전사한 끝에 퇴각하기도 하였다.1909년 9월과 10월 호남지역 일대에서 일제가 벌인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많은 의병들이 학살되거나 붙잡혔다. 이때 일시 피신하였으나, 잔여 의병에 대한 일제의 수색이 한창 진행 중이던 그 해 12월 적에게 붙잡히기 직전 일본헌병대 고부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 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자, 몇 차례 항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어 1910년 5월 3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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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교(絞) 광주지방재판소전주지부 1909-12-2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공소 기각 대구공소원형사부 1910-03-05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내란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0-04-0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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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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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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