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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087
성명
한자 南晩鎭
이명 南葛百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8 영해(寧海)시장 장날을 기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3.19 대구(大邱)에서 출동한 왜군(倭軍)의 무차별 난사로 인하여 좌편(左便)엉덩이에 적탄(敵彈)을 맞고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고생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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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知品面洛坪洞)교회 조사(助事)로서 유학(留學)차 평양(平壤)으로 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평양행을 단념하고 즉시 귀향한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18일의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의 영해면·병곡면(炳谷面)·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면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한편 이같은 거사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8일 오후 1시경,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정규하(丁奎河) 등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가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이곳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이때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고 영덕 경찰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하였는데, 그는 격분한 시위군중과 함께 그들을 추적 포위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세례를 가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여관에 감금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이날 밤과 이튿날까지 계속되어 오전 11시경 포항(浦項)헌병대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들도 이 엄청난 시위군중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후 5시 대구(大邱)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6명이 부상당하였는데, 이때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그도 총상을 입고 평생을 불구자로 보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3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만진 남갈백(南葛百) 경상북도 영덕(盈德) 영해면 만세시위
본문
1894년 4월 25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원구동(元邱洞, 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남갈백(南葛百)이다. 1919년 3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영해면의 만세시위는 기독교 조직을 통해 세력을 규합해 가면서 시작되었다.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인 김세영(金世榮)은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평양신학교로의 유학을 단념한 채 고향에 돌아와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3월 12일 김세영은 낙평동 교회의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런데 이튿날 김세영이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검거됨에 따라, 이후의 만세시위는 권태원이 주도하게 되었다. 권태원은 3월 15일 병곡면(炳谷面) 송천동(松川洞)의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만나 김세영의 계획을 전하고 그의 찬동을 얻어냈다. 권태원과 정규하의 적극적인 세력 규합 노력 속에 권상호(勸相鎬)·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박희락(朴羲洛) 등이 만세시위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송천동의 기독교도는 물론 권씨·남씨·박씨·이씨·백씨 등 영덕의 대표적 유림인 5대 성씨 일족들을 규합해 나갈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와 유림의 연합세력이 구축되었다.영해면 성내동시장의 장날인 3월 18일 오후 1시경 주도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행진이 이어졌다.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함께 행진하던 중 영해경찰관주재소의 스즈키 쓰루지로(鈴木鶴次郞) 주임순사가 해산을 명령하자 주임순사 이하 순사와 순사보들을 구타하고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였다. 시위대는 이어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공립심상소학교,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시설들을 파괴하였다. 시위대 중 일부는 주도자들을 따라 병곡면 병곡동(柄谷洞)으로 이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병곡경찰관주재소 및 병곡면사무소 시설을 파괴하였다. 이에 경찰과 헌병이 발포하려 하자 시위대는 오후 6시경 영해로 돌아갔다.3월 19일에도 영해면의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오전 10시경 포항헌병분대에서 헌병대가 파견되었으나 시위대를 진압할 수 없었다. 오후 5시경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증파되었다. 일본 헌병과 보병은 합세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이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시위대 중 사망자가 생겨나는 가운데 총상을 입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영덕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영해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경상북도 영덕군
2 영해 3·18만세운동 기념탑 경상북도 영덕군
3 영해 3·1의거 탑 경상북도 영덕군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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