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20년 6월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사리원(沙里院)에서 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 산하 사리원청년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청년단은 1919년 음력 8월경 조직되어, 황해도 각 군에 징수위원을 두고 인구세(人口稅) 및 애국금(愛國金)을 모집해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하는 활동을 하였다. 김태용은 1920년 6월 6일 손재흥(孫再興)ㆍ김청풍(金淸風)ㆍ이정률(李廷律) 등과 함께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文井面) 어수리(御水里)에서 독립청년단 산하 조직인 사리원청년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부할 것,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조선인 경찰관리, 밀정을 살해할 것, 독립운동자를 밀고한 자는 살해할 것, 조선 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할 것, 임시정부에서 송부해 온 독립운동 인쇄물을 일반 조선인에게 배포하여 그 사상을 선전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청년단의 임원으로 단장 손재흥, 부단장 이정률, 총무 김청풍ㆍ김태용, 서기(書記) 변인봉(邊麟鳳)ㆍ김치은(金致殷), 교통원(交通員) 권국빈(權國彬)ㆍ곽익호(郭益浩)ㆍ곽선호(郭善浩)로 정하였다.
김태용은 1920년 7월 20일 평남 중화군(中和郡) 중화면(中和面) 석전리(石?里)에서 손재흥으로부터 신표성(?表晟)이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한 500원과 손재흥이 김사인(金史人) 등으로부터 모집한 900원을 평북 의주군 위북면(威北面) 북하동(北下洞) 도선장(渡船場)에서 기다리고 있는 임시정부 파견원 최명식(崔明植)에게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1일 김치은ㆍ신표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1,400원을 지니고 순안(順安)ㆍ숙천(肅川)ㆍ박천(博川)ㆍ정주(定州)ㆍ선천(宣川) 등지를 거쳐 의주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인 8월 2일 중국 안동(安東)에서 건너올 최명식을 기다리고 있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1997) 제32권 3~5, 11, 15, 36~37, 64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1998) 제33권 231면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 1921. 8. 1)
- 每日申報(1921. 1. 15, 3. 24, 4. 28, 8. 3)
- 東亞日報(1921. 5. 18, 6. 9)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9집 1066~1071, 1082~1087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 1921. 5. 17)